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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Intel)은 전세계 60개국의 나라에 9만 9천명이 고용되어 있으며 380억달러가 넘는 매출에 120억달러라는 높은 순이익을 자랑하는 세계최고의 반도체 회사이다.  특히 펜티엄 시리즈를 대표로 한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주력산업으로 현재 개인용 컴퓨터의 70%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그밖에 플래쉬램, 네트워크 카드, 그래픽 칩, 메인보드 칩셋등 컴퓨터의 핵심 부품들을 개발 연구하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IT 기업이다. 지금은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유명하지만 사실 인텔은 세계 최초로 메모리를 개발한 회사로 70년대 초반만해도 전세계에서 메모리 점유율 100%에 이익률이 50%가 넘는 회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에 일본 업체들이 싼 가격으로 메모리 시장에 대량 공습으로 진격해오자 주력 업종을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바꾸었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인텔은 미국 벤처산업의 총본산이라고 하는 실리콘 밸리의 대부이자 단단한 버팀목이다. 이번 장에서는 인텔의 창업공신 앤디 그루브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 세계 디지털 산업의 혁명을 불러 일으킨 인텔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인텔의 역사는 단순히 미국 디지털의 역사가 아니라 세계 디지털의 역사이기도 하며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를 만들어낸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인텔의 창업과정과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는 건 디지털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


디지털의 역사의 신기원 – 트랜지스터


트랜지스터는 전기신호를 증폭해주는 장치이다. 라디오에서 방송국의 전기신호를 잡아서 소리로 증폭시켜줄 때 바로 트랜지스터가 사용된다. 마이크로 입력되는 소리를 스피커로 증폭해서 출력시켜주는 것도 바로 트랜지스터의 역할이다. 트랜지스터는 컴퓨터에도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 과거 애니악 컴퓨터는 실험실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전자신호를 진공관으로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랜지스터가 이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컴퓨터의 소형화를 이루어 냈다. 기술의 발전으로 트랜지스터의 크기는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에서 트랜지스터는 0과 1의 전기신호를 받아내는 역할을 한다. 마이크로프로세서안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 숫자에 따라서 성능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텔을 창업한 고든 무어(Gordon Moore )는 1년 6개월마다 CPU속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숫자가 두배씩 늘어 난다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18개월의 주기를 가지고 CPU안에 집적되는 트랜지스터는 두배씩 늘어났고 성능도 두배씩 발전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무어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1947년 트랜지스터는 벨연구소에서 일하는 윌리엄 쇼클리(William Shockley)의 책임아래 존 바든(John Bardeen) 그리고 월터 브래튼( Walter Brattain) 주도로 발명되었다. 트랜지스터의 발견은 단순히 컴퓨터 역사가 아니라 전자산업 더 나아가 인류 전체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던 만큼 그들은 1956년도에 모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연구 책임자였던 윌리엄 쇼클리는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공로로 승진과 더 많은 성과급을 원했지만 벨 연구소는 그의 요구조건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결국 윌리엄 쇼클리는 연구소를 그만두고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프로젝트를 새롭게 진행 발전 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 마침 이 소식을 들은 스탠포드 대학의 프레드릭 터먼(Fredrick Terman) 교수가 윌리엄 쇼클리를 찾아가 만나게 된다. 프레드릭 터먼 교수는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토대를 구축한 벤처기업의 아버지이다.


 1950년대만 해도 미국 동부와 서부는 기업의 편중현상이 심각하였다. 동부는 뉴욕을 중심으로해서 미국의 모든 대기업들이 몰려있어서 많은 일자리가 있었던데 반하여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은 변변한 일자리하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스탠포드의 교수인 터먼 교수는 애써 열심히 가르친 제자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하여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인재들이 모두 동부지역으로만 몰려가니 서부지역은 항상 제자리 걸음이고 빈곤의 악순환이었다. 그래서 터먼교수는 스탠포드 대학 주변에 연구시설을 마련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이들이 부담없이 회사를 창업해서 훌륭한 기업가로 성장하도록 돕고 싶었다.  그가 첫번째로 길러낸 기업인이 바로 윌리엄 휴랫과 데이빗팩커드 였다. 이 둘은 학생시절부터 성실한 학업태도와 뛰어난 머리로 터먼교수의 눈에 들었다. 터먼교수는 연구공간을 마련해줄 테니 거기서 만든 제품을 상업화해보라고 권유한다. 둘은 회사이름에 자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넣기로 하고  동전을 던져서 순서를 정하기로 했다. 동전이 앞면을 가리키며 떨어지자 휴렛의 이름이 앞에 먼저 쓰기로 결정됐다. 이것이 바로 실리콘 밸리 벤처 1호로 인정받는 HP(Hewlett-Packard)의 시작이다. 538달러의 자본금으로 어느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된 HP는 현재 15만명의 고용인원에 매출은 무려 890억달러를 바라보는 엄청난 기업으로 발전했다. HP는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발생지로 인정받고 있을 정도로 그 역사적 의미가 대단히 크다. 


터먼교수는 1930년대에 창업된 HP가 어느정도 성과를 냈던 1950년대에 이르자 좀더 구체적으로 벤처기업을 육성시킬 계획을 세운다.  스탠포드 대학교 주변의 부지를 기업에게 싼값에 제공하면서 입주를 적극 권유하였고 학생들의 창업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 스탠포드 대학의 뛰어난 연구인력과 학생들을 기업에 제공하는 산학협력 체제를 무기로 해서 기업들을 학교지역 주변에 유치하자는 것이 터먼교수의 생각이었다.  윌리엄 쇼클리와의 만남도 스탠포드대학의 교수직 제안과 함께 대학 주변에 회사를 창업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그 만남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서 터먼교수의 뜻대로 윌리엄 쇼클리는 벨연구소가 있는 뉴저리를 떠나서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가 되는 동시에 1956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창업했다.


노벨상 수상자가 회사를 만들었다고 하자 서부지역의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터먼교수가 기대했던 그런 효과였다. 하지만 윌리엄 쇼클리는 학문적인 깊이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상업성을 갖춘 제품개발에는 역부족이었다. 윌리엄 쇼클리가 연구한 분야는 트랜지스터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계속되는 실패를 거듭했다. 문제는 윌리엄 쇼클리는 연구에 뛰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인간관계와 리더쉽은 부족한 사람이었다. 상품 개발은 늦어지면서 회사의 수익은 나지 않고 연구비만 들어가게 되자 윌리엄 쇼클리 교수는 상습적으로 부하직원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이때 회사의 운영에 불만을 품은 여덟명의 직원이 있었다. 평생토록 윌리엄 쇼클리는 그들을 8인의 배신자라고 불렀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인텔과 앤디 그로브 


1957년 회사를 그만둔 8명의 직원들은 비록 상용화 제품은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공동된 목표를 세울수 있다면 세상을 깜짝놀래킬 상품을 개발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서부지역에는 이들 여덟명을 받아줄만 한 회사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8인의 배신자들은 회사를 새로 창업하기 위해서 투자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동부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는 페어차일드(Fairchild) 그룹과 접촉하게 된다. 페어차일드의 창업자 셔먼은 IBM에 투자를 해서 큰 돈을 벌었다. 그 후  페어차일드는 카메라와 각종 전자제품을 만들어 내는 대기업이었다. 페어 차일드로 부터 150만달러의 투자를 받아낸 그들은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된다. 페어차일드 본사로부터 몇가지 참견은 있었지만 그래도 쇼클리 연구소에 있었던 8인의 주장이 대부분 받아들여졌고 실리콘소재를 이용한 트랜지스터를 개발해서 상업화하기도 한다. 이 제품은 윌리엄 쇼클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트랜지스터 상업화의 걸림돌이었던 여러 문제를 실리콘 소재를 사용해서 해결했는데 이는 8인의 멤버들이 이미 노벨상 수상자 윌리엄 쇼클리를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사건이었다. 

 

 

 

 


그후에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승승장구 하였으며 반도체와 관련된 세계최초의 기술들을 선보이며 미국에서 유명 과학자로 대접받게 된다. 그런데 회사가 성장하면 할수록 제품을 실제로 개발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페어차일드 본사사람들의 배만 불리게 해주었다. 8인의 멤버중에서 리더역할을 했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는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중요자리들이 본사사람들의 낙하산인사로 채워지자 불만이 쌓여갔다. 이미 8인의 배신자들중에 고든무어(Goden Moore)와 자신만 빼고 이미 여섯명의 동료는 페어차일드 본사의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고 모두 회사를 나간상태였다.  노이스는 끝까지 남으려 했지만 페어차일드 본사에서 내려보낸 사장과의 불화가 커지면서 결국 회사에 사표를 던진다. 이때 그의 단짝이었던 고든 무어에게 같이 사업을 하는게 어떠냐고 제안을 한다. 고든 무어는 로버트 노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하고 같이 회사를 그만둔다. 사실 둘은 실리콘을 이용한 첨단 제품을 만든다는 비전만 가지고 있었지 구체적인 사업 계획은 없었다. 


페어 차일드와 8인의 배신자들을 연결시켜주었던 금융가 아서록((Arthur Rock)이 주축이 되어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하지만 이미 밥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반도체 업계의 슈퍼스타였다. 이 둘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자 전국에서 서로 투자를 하겠다고 달려들 정도였다. 그들은 구체적인 사업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냅프킨에 적힌 몇가지 메모만으로도 단하루만에 250만달러나 되는 돈을 투자 받았다. 언론에서도 이들의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앞으로 펼쳐질 회사에 큰 기대감을 표현했다.  처음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는 회사명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노이스-무어 일렉트로닉스(Noyce-Moore Electronics)로 정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잡음을 뜻하는 Noise와 많다를 뜻하는 More의 합성어로 헷갈려서 부정적인 이미지의 노이즈 무어즉 “잡음이 많다”를 떠올렸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새로운 회사이름을 찾아야 했다. 그들의 전문분야인 전자 집적회로를 표현하기 위해서 통합을 뜻하는 Integrate와 전자를 의미하는 Electronics 두 단어의 앞글자 들을 조합해서 인텔(INTEL)이라고 하였다. 로버트 노이스는 새로운 회사명이 지적인 느낌의 인텔리전트(Intelligent)를 떠올린다고 생각해서 특히 좋아했다. 그런데 이미 호텔 체인사업을 하는 다른 회사에서 인텔코(Intelco)라는 사명을 가지고 이었다. 회사이름에 애착을 느낀 노이스는 인텔코에게 1만 5천달러를 주고 회사이름을 구입했다.


1968년 창업한 인텔에 첫번째로 회사에 스카우트되어서 일을 시작한 사람은 앤디 그로브였다. 앤디 그로브는 이미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연구소에서 뛰어난 연구실적으로 최고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당시 8인의 반란자들은 사이가 좋았고 여전히 친밀하였다. 실제로 인텔의 초기 투자자에는 8인 반란자들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 로버트 노이스는 8인의 배신자들과 함께 회사를 같이 차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앤디 그로브가 인텔에 합류할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고 그의 출중한 실력이라면 로버트노이스와 고든무어 다음의 세번째 실권자가 될것임을 뜻하였다. 앤디 그로브의 부하직원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결국 로버트 로이스의 새로운 회사인 인텔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 그리고 앤디 그로브는 완벽한 삼두체제를 이루며 인텔의 성장을 견인했다. 하나의 기판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기술에 있어서는 로버트 노이스가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로버트 노이스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해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려고 했다. 그 첫번째가 세계최초의 메모리칩 개발이었다. 로버트 노이스가 메모리 칩의 개념과 설계회로를 작성하는 역할을 했다면 앤디 그로브는 메모리칩을 실제로 제조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고든 무어는 제품개발에 문제가 있으면 해답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이론상에 시제품을 개발한다는 것과 대량생산을 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기술적인 괴리가 있었다. 1969년 첫번째 메모리를 개발했지만 실제 생산에 들어간 것은 1970년이었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의 일은 연구소의 몇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었지만 제조 분야를 맡은 앤디 그로브는 회사의 모든 직원들을 관할해야 했다. 공장의 모든 설비를 직접 셋팅해야 했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뽑아서 교육시키고 관리해야 했다.  초기 메모리 양산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10개만들면 9개가 불량품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앤디 그로브는 50%정도의 성공율로 끌어 올렸다. 당시로써는 이 수치도 획기적이었다.


 또한 미세한 먼지가 반도체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몇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앤디그로브는 먼지에 대한 문제를 알게 된다. 그는 미세먼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방진복을 최초로 고안한다. 세계최초로 방진복을 도입한 만큼 이는  인텔의 상징이었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춤을 추는 것도 이 같은 이유이다. 

 

 

 


비록 그가 인텔의 창업자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인텔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한다면 당연 앤디 그로브이다. 로버트 노이스는 초기 메모리칩 개발에만 과연했을 뿐이지 그는 곧 회사의 사장으로 외부활동에 더 바쁘게 된다. 그리고 원래 여유와 낭만을 즐기는 로버트 노이스는 업무보다는 취미생활에 몰두했다. 어느덧 로버트 노이스는 인텔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되고 조금씩 실무에서 손을 떼게 된다. 75년도에 회장이 된 그는 거의 회사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회사의 중대한 결정이 있을 때나 잠시 관여할 뿐이었다. 79년 까지 회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복도에서 직원의 얼굴을 보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자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고든 무어의 경우는 전형적인 학자타입으로 회사의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번 출근하면 연구소 밖을 거의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연구에만 몰두햇다. 직원들이 찾아와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해답을 제시하는것에 보람을 느꼈다. 일반직원이 며칠동안 밤을 새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고든무어에게 찾아가면 단 몇 시간만에 해답을 가르쳐줄 정도였는데 그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즐겼다.   결국 경영이나 조직관리 그리고 예산과 회계문제에 있어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앤디 그로브였다. 생산부서도 책임지는 앤디 그로브였기 때문에 공장설비와 가동에도 그가 관여했다. 물론 제품의 제품제조와 대량생산을 위한 연구에서도 앤디 그로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인텔의 역사를 다루는 많은 책들은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에 대한 언급보다는 앤디 그로브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기 마련이다. 그만큼 앤디 그로브의 역할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인텔에 관한 책중에서 최고의 명저로 뽑히며 97년도 비즈니스 위크가 선정하는 올해의 경영서적에 뽑힌 인텔 인사이드의 저자 팀잭슨은  앤디 그로브야 말로 인텔 성공의 첫번째 공헌자라고 정의하였다. 


 97년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앤디 그로브를 선정하며 그를 디지털 시대의 계승자이자 선구자이며 디지털 혁명을 이끈 주인공이라고 극찬하였다. 미국이 첨단산업에서 누리는 성과들이야 말로 앤디 그로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정도로 그는 단순히 인텔이 아니라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창조한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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