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텐도처럼 창조한다는 것(4)


1991년 일본에서는 부동산 버블이 붕괴가 장기 불황의 시대가 열린다. 이는 2006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미국에 끼친 영향보다도 당시 일본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져 주었다. 마침 1991년 HAL 연구소는 대규모의 사옥을 완성하는데 버블붕괴의 영향으로 자산가치가 하락하면서 경영위기를 겪게 된다. 결국 1993년 HAL 연구소는 무려 50 억엔에 이르는 부채를 갚지 못하고 부도가 난다.


 그리고 회사 위기 상황에서 구원투수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32세의 프로그래머 이와타 사토루였다.  이와타 사토루의 뛰어난 기술력과 친화력은 난파된 HAL 연구소의 새로운 선장으로 최적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이와타 사토루가 HAL 연구소의 사장을 맡은 것은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이와타사토루가 명문대생으로써 HAL 연구소라는 벤처기업을 선택한 것이 일종의 모험이라면 HAL 연구소의 사장이 되는 것은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본에서는 회사가 빚을 지면 사장이 책임을 지어야 하는데 무려 50억엔의 빚을 지고 있는 회사의 사장이 되겠다는건 보통 정신으로 선택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좋은 회사에서 더 많은 연봉을 주겠다는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이와타 사토루는 이미 결혼을 해서 아이도 있는 남자였다. 사실 이와타 사토루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아내가 HAL 연구소의 사장이 되는 것에 반대 하지 않았다는 것에 가장 고마워할 정도로 그 자신도 꽤 위험한 선택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타 사토루가 그 위험한 HAL 연구소의 사장직을 받아들인 데는 두 가지 성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선 같이 땀흘렸던 동료들을 놔누고 도망갈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사실 그는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도망가거나 피하는 것을 아예 옵션으로 조차 생각하지 않는 성향의 소유자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서 방관자가 아니라 당사자가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찬스가 있는데 그것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고 힘이 있으면 그것을 전부 사용하자라는 신념의 소유자인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리스크가 없으면 성취감도 느끼지 못하는 승부사 적인 기질을 타고난 만큼  사장직 제의가 왔을 때 피하지 않고 직접 위험한 도박의 주인공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또한  이와타 사토루는 이공계 출신으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 즉시 각오가 서는 인물이었다. 이와타 사토루는 사물을 논리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으로써 스스로 사장이 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라는 결론을 얻었다.  왜냐하면 HAL 연구소는 기술에 강점이 있는 회사인데 결국 개발의 총 책임자였던 자신이 회사를 부활시키는데 적격자라고 봤다. 


그런데 이와타 사토루가 경영 서적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자신이  사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도 다른 사람보다 논리적으로 생각 할 수 있는 사고력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렇게 논리적인 이치 따지기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가 프로그래밍작업을 통해서 수련한 결과이기도 하다.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은 사람이 원하는 작업을 컴퓨터에 구현하기 위한 논리적인 명령들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프로그래밍작업에서 하나의 오류만 있어도 컴퓨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프로그래머들은 코드를 짤 때 끊임없이 가설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는 작업을 반복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프로그래머들은 자연스럽게 논리적 사고를 익히게 된다. 그는 컴퓨터와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항상 프로그래밍 작업을 통해서 곤란한 과제를 분석하고 실마리를 찾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경험들이 회사를 경영하는데 큰 도움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와타 사토루의 행복 경영


이와타 사토루가 사장이 된 후 가장 먼저 한일은 대내외에 신용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우선  빚을 독촉하는 은행을 상대로 40억엔 부채가 있지만 우선 1년에 2억 5천만엔씩 6년에 걸쳐15억엔을 먼저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자 어떤 은행은 32세의 젊은 사장인 이와타 사토루에게 고압적으로 행동하였지만 그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사실 은행 입장에서도 HAL연구소가 진 빚이 부담스러운 금액이라는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이와타 사토루는 90명이 넘는 전직원을 상대로 직접 면담을 시작했다. 이때 이와타 사토루는 회사 재건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 매일 철야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직원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해서 면담을 진행했다. 직원들은 회사를 믿고서 열심히 일을 했을 뿐인데 회사가 망했으니 직원들이 회사를 불신하는 건 당연하다고 봤다.  


그래서 직원들과 대화를 통해서 회사의 미래 계획을 함께 세우려고 했다. 직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서 이를 경영에 반영하려는 것으로 이미 계획을 세워놓고서 직원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형식적인 면담이 아니었다. 이해와 공감을 얻기 위한 장으로써 면담을 활용한 것이었다. 면담의 주제는 직원들에 따라서 달랐지만 그는 항상 첫 번째로 지금  행복한지를 물었다.  원래 이와타 사토루는 사장이 된 후 상품 만들기를 통해서 직원과 고객이 같이 행복해지는 회사로 슬로건을 정할 정도로 행복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면담을 통해서 회사도 행복하고 직원도 행복한 방법을 찾으려 했다. 이와타 사토루는 회사가 직원을 올바르게 알아주고 직원의 행복을 제대로 생각해주는  회사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와타 사토루가 면담을 통해서 깨달은 한가지는 회사와 직원이 동일한 가치관을 함께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상호 행복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면담은  직원과의 소통을 통해서 서로 기분이 좋아질때까지 장시간이라도 대화를 나누었다. 이와타 사토루는 직원간의 면담이 자신에게 훌륭한 교육의 장이 되고 직원들의 신뢰을 얻는 좋은 소중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원래는 6개월동안 하려던 면담은 그가 HAL연구소에서 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계속되었다.


HAL 연구소가 경영위기에 빠진 이후 회사는 이른바 자전거 조업이라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거 조업이란 자전거 폐달을 밝지 않으면 넘어지듯이 만성적으로 자본이 부족해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물건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회사가 도산하게 되는 상황을 일컫는다. 게임이 출시되면 고객들이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게임을 내놓아야 하는 악순환에 대해서 이와타 사토루는 악마의 사이클이라고 부르곤 했다.  결국 이러한 악마의 사이클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역시 킬러컨텐츠가 될 수 있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별의 카비 개발 스토리


그런데 마침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바로 HAL 연구소에서 들어온 사쿠라이 마사히로가 중심이 되어서 초보자들도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인 팅클 ☆ 포포라는 게임을 제작한다.  게임은 출시전부터 화제가 되어서 사전 예약만 2만 5천개를 받았다.  그런데 닌텐도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의 총책임자인 미야모토 시게루가 게임이 너무 좋으니 조금 더 수정해서 발매하라고 충고한다.  

오래전부터 이와타 사토루가 게임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미야모토 시게루였다. 마리오와 젤다의전설등을 창조한 그는 만드는 게임마다 밀리언 셀러를 연발하면서 게임의 신으로 불리었다. 미야모토 시게루는 닌텐도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던 만큼 이와타 사토루와는 오랜시간 친교를 맺고 있었다.  미야모토 시게루가 옆에서 여러 게임을 히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떡하면 HAL 연구소가 미야모토 시게루처럼 인기있는 게임을 만들지 고심을 했다. 직접 미야모토 시게루의 비법을 연구한 레포트까지 작성할 정도의 이와타 사토루였던 만큼 미야모토 시게루의 의견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2만 5천개라는 적지않은 예약을 받은 상태에서 제작을 전면 중지하고 다시 게임을 개발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다. 특히 영업부에서는 회사의 신용을 손상시킨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고심끝에 이와타 사토루는 미야모토 시게루의 의견을 들었고 게임 발매를 취소하고 다시 게임을 개발한다. 그 후 이 게임은 팅클 ☆ 포포 별의 카비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게임보이용으로 출시하게 된다.  별의 카비는 발매후 무려 500만장이 판매되었고 시리즈 전체는 2천만개가 넘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며 HAL 연구소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다. 


별의 카비의 빅히트 이후 이와타 사토루는 두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는 것이다. 팅클 ☆ 포포가 완성 된 후 이와타 사토루는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는 이와타 사토루가 고객이 아니라 개발자 그리고 회사 관계자의 입장에서 제품을 바라봤기 때문에 문제점을 찾아낼수 없었다. 하지만 미야모토 시게루는 철저히 고객의 입장에서 팅클 ☆ 포포의 아쉬운점을 찾아냈다.  


둘째 이와타 사토루가 꺠달은 교훈은  모든 사람이 미야모토 시게루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팀워크를 발휘해서 만든다면 더 훌륭한 아이디어를 탄생시킬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별의 카비는 팀 워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된 좋은 교훈이 되었다

별의 카비는 게임을 해보지도 않은 사람도 쉽게 할 수 있는 초심자용 게임으로 큰 성공을 거두자 이때부터 야마우치 히로시도 이와타 사토루를 주의깊게 살펴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야마우치 히로시의 철학은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추구하는데 별의 카비가 바로 그가 원하던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HAL 연구소 부활에는 역시 이와타 사토루의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도 한 몫한다. 일본에서 광고천재로 통하는 이토이 시게사토는 닌텐도에 마더라는 신개념의 게임을 제안한다. 그의 천재성을 높이 산 야마우치 히로시는 그가 제안한 게임을 개발하도록 도와준다.  마더는 닌텐도의 첫번째 게임기인 패미컴으로 발매되서 히트를 하게되고 야마우치 히로시는 아예 이토이 시게사토에게 APE라는 회사를 창업시켜준다. 그 후 APE사의 사장이 된 이토이 시게사토는  팍스소프트와 공동으로 마더2를 개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4년동안 게임이 완성되지 않아서 관계자들의 속을 타들어 가게 만든다.  사실 이토이 시게사토는 광고 크리에이터 출신으로 컴퓨터 지식이 전무하였다. 그래서 당시 컴퓨터 성능과 프로그래밍 기술로는 황당 무계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이토이 시게사토가 기획한 마더2에는 실제 게임으로 구현하기에는 난이도가 높은 아이디어로 구성되었었기 때문에 실제 개발작업도 별 진척없이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던 것이다.  원래 닌텐도에서는 게임 개발이 어려움에 처하면  이와타 사토루에게 SOS를 쳤는데 마더 2 역시 사실상 개발이 포기상태에 이르자 해결사 이와타 사토루를 호출했다.  


당시 개발중이던 마더2를 분석한 이와타 사토루는 만약에 기존 프로그램을 고쳐서 개발한다면 3년이 더 걸리겠지만 만약 자신이 처음부터 개발하면 1년만에 완성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와타 사토루가 장담한대로 4년 동안 완성하지 못했던 마더 2는 1년후에 발매된다. 이 에피소드는 슈퍼 프로그래머 이와타 사토루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마더2의 기획자 이토이 시게사토는 이와타 사토루의 처음 제안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냥 자신이 하면 1년 걸린다고 하면 될것을 궂이 기존의 방식대로 개발할 경우 3년 걸린다는 옵션을 던져주고 상대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이와타사토루의 대화방식이 흥미로웠다. 이는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기 보다는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공개한 후 대안을 제시하는 이와타 사토루식의 대화법 이었던 것이다.  


한편 4년 동안 교착상태였던 마더2를 1년 만에 개발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은 개발 도구의 자동화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게임이라는 것은 화면의 캐릭터 움직임이나 배경 처리등의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다.  그런데 효율적인 개발 도구라는 것은 이런 단순 반복으로 이루어진 일들을 컴퓨터가 대신 처리해주는 자동화에 달렸는데 이와타 사토루의 프로그램은 이부분에서 탁월했다.  원래 이와타 사토루가 컴퓨터가 프로그래머에게 매력을 가지게 된 이유자체가 인간이 반복해서 해야하는 귀찮은 일을 기계에게 시킬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또한 이와타 사토루가 만든  개발 도구는 프로그래머들뿐만 아니라 컴퓨터 지식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기획자나 그래픽 디자이너도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쉬웠다. 원래 그래픽 디자이너가 그림을 그리면 당시만 해도 무조건 프로그래머의 도움을 받아야만 컴퓨터 화면상에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타 사토루의 자동화된 게임개발 도구를 이용하면 그래픽 디자이너는 프로그래머의 도움 없이 간편하게 원하는 그림을 게임 화면상에서 즉시 확인할 수 있었다. 프로그래머의 도움을 최소화하고 그래픽디자이너가 원하는 그림을 즉시 게임 화면에 구현해주는 이러한 개발도구의 개념은 당시로써는 획기적이었다. 사실 슈퍼패미컴 시절만 해도 닌텐도가 다른 소프트웨어 업체에게 제공했던 개발도구에 대한 불평이 많았었다.  그런데 닌텐도 64에서부터 겨우 게임 개발 도구라고 부를 수 있는 툴을 제공했다.. 그런데  이 게임 개발 도구를 만든 곳이 바로 HAL 연구소 였다.  HAL 연구소가 닌텐도의 게임 개발 도구를 만들어 주는 회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이와타 사토루의 뛰어난 프로그래밍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스매쉬 브라더스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



이와타 사토루가 HAL 연구소에서 선보인 마지막 작품은 스매쉬 브라더스였다. 이 게임은 닌텐도의 인기 캐릭터가 총출동한 격투 게임으로 최근에 닌텐도 위로 발표된 스매쉬 브라더스 X가 840만장이 넘게 팔릴정도의 대표적인 킬러 컨텐츠이다.  사실상 이 게임을 통해서 HAL연구소는 부활할 수 있었고 이와타 사토루가 닌텐도로 가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스매쉬 브라더스는 별의 카비를 만든 사쿠라이 마사히로의 뛰어난 기획력과 이와타 사토루의  기술력 이외에도 닌텐도와의 협업이 빛을 발했다. 


스매쉬 브라더스는 원래 정식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이와타 사토루와 사쿠라이 마사히로가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한번 만들어본 작품이다.  처음 게임의 모습은 회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후지산 배경에 당시 인기 있었던 광고 캐릭터인 펩시맨을 이용한 격투게임이었다. 그런데 나중에는 닌텐도의 인기 캐릭터인 마리오와 돈키콩등을 등장 시킨 새로운 형태의 격투게임을 만드는게 더욱 승산이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리오와 돈키콩을 만든 미야모토 시게루는 격투게임에 자신의 캐릭터가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 사실을 직접 들은 이와타 사토루는 사쿠라이 마사히로에게 알리지 않고  닌텐도의 캐릭터들을 그대로 사용해서 우선 게임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당시 사쿠라이 마시히로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면 게임도 없었을 것이라고 밝힐 정도로 위태한 순간이었지만  이와타 사토루는 대범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갔다. 이와타 사토루 생각에는 좀더 완벽하게 게임을 만들어서 가져가면 분명 미야모토 시게루도 허락할 것이라는 생각에 일부러 프로젝트를 강행하게 된다. 그리고 마리오가 실제로 돌아가는 게임을 본 미야모토 시게루는 흡족해 하며 결국 허락하고 만다. 


이번에도 역시 이와타 사토루는 스매쉬 브라더스를 통해서 소중한 교훈을 깨닫게 된다. 우선 고객과의 소통이었다. 1999년 당시에는 인터넷이 활성화 되지 않았는데 HAL연구소는 스매쉬 브라더스가 발매 된 직 후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었다. 이는 고객과 직접 소통하겠다는 개발자들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원래 이와타 사토루는 장인으로써 상품을 만드는 것에 최선을 다할 뿐 그 다음에는 입을 조용히 다물고 있는 것이 더욱 근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터넷을 통해서 고객과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손님의 의견을 듣는다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미디어 믹스로써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동안 개발자가 고객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방법이 한정되었지만 인터넷을 활용한다면  더욱 멋지고 매력적인 그 무엇을  낳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타 사토루는 스매쉬브라더스를 만들면서 게임 개발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게임을 개발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는 점이었다. 게임이 더욱 복잡하고 화려해지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앞으로 소프트웨어의 미래는 없다는 문제였다. 대작을 만들기 위해서 작업량은 방대해지고 작업량은 그만큼 늘어나니 신선한 아이디어를 좀더 빠르게 고객에게 선보이기가 힘들어지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는 호화로운 대작 위주의 게임이 꼭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악순환을 끊어야 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생각은 대작의 게임보다는 쉽고 가볍게 즐기는 게임이 더욱 소중하다는 야마우치 히로시의 경소단박론과 일맥상통하였다.  사실 스매쉬 브라더스는 기존의 격투게임과는 확연히 달랐다.  격투 게임은 시리즈가 계속 될수록 한 캐릭터당 가지고 있는 기술의 숫자가 늘어난다.  


게임을 1탄부터 한 사람은 늘어나는 기술이 부담스럽지 않겠지만 처음 게임하는 사람은 복잡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1999년 당시에 격투 게임은 초보자가 하기 힘든 마니아들만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래서 스매쉬 브라더스는 누구나 쉽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경소단박형 게임으로 제작한것이었다. 이런 이와타 사토루의 의도는 정확하게 적중하였다.  99년 1월에 일본에서 발매된 스매쉬 브라더스는 197만장이 판매되고 미국에서는 293만장이 판매되면서 격투 게임으로써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HAL 연구소의 재정은 더욱 좋아졌다. HAL 연구소를 부활 시키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야마우치 히로시는 2000년 되자 이와타 사토루는 닌텐도로 스카우트 한다. 경영 기획본부의 실장으로 발탁된 이와타 사토루는 2001년 발매된 가정용 게임기 게임큐브의 개발을 담당하게 되고 입사한지 단 2년만인 2002년 43살의 어린나이에 닌텐도의 사장으로 임명된다.



지금까지 이와타 사토루가 닌텐도에 입사하기전 까지의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와타 사토루가 닌텐도에 입사하기 전까지의 삶의 궤적들을 살펴보면 왜 야마우치 히로시가 이와타 사토루를 닌텐도의 사장으로 선택했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첫째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에 대한 기술이다. 이는 사실 야마우치 히로시가 가지지 못한 능력이자 닌텐도의 단점이었다. 하지만 슈퍼 프로그래머 소리를 들었던 이와타 사토루였던 만큼 닌텐도가 기술을 잘못사용해서 실패할 확률은 그만큼 적어질 것이다.  둘째 도산직전의 회사를 살려낸 경영능력이다. 야마우치 히로시는 이와타 사토루가 기대에 한번도 배신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했는데 HAL연구소를 부활시키는 과정에서 어떠한 구설수 없이 사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서 난파된 회사를 구한건 이와타 사토루의 능력을 충분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셋째 야마우치 히로시와 비슷한 철학이다. 평소 게임은 누구나 쉽고 가볍게 즐길수 있어야 한다는 경소단박을 강조한 야마우치 히로시의 철학이 HAL 연구소에서 발매된 게임인 별의 카비와 스매쉬 브라더스에 그대로 구현되었다. 이렇게 야마우치 히로시가 가지지 못한 기술 그리고 야마우치 히로시가 기대하는 경영능력 그리고 야마우치 히로시와 같은 개발철학을 공유했기 때문에 이와타 사토루는 수많은 유력후보들을 제치고 입사 2년만에 사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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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





닌텐도 처럼 창조 한다는 것 <2>


이와타 사토루는 1959년 일본의 삿포루에서 태어난다. 어린 시절부터 천식이 있었던 그는 전학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며 자라야 했다. 그랬던 이와타 사토루의 인생전체를 바꾸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휴렛패커드에서 발매한 공학용 전자계산기였다. 휴렛패커드의 전자계산기는 아폴로 11호가 달에 발사 됐을 때 승무원들이 이용해서 많은 젊은이들에게 첨단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기기였다. 애플의 창업자중에 한명인 스티브 워즈니악 역시 HP의 공학용 계산기를 몹시 아꼈던 걸로 유명하다. 또한 델 컴퓨터의 창업자 마이클 델이나 이베이의 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에르 같은 IT 거장들 역시 전자계산기의 매력에 빠지면서 컴퓨터의 세계로 입문했다.  HP의 공학용 계산기는 당시 가격으로 무려 2백만원이 넘을 정도로 비싼 기계였다. 하지만 이와타 사토루는 이 전자계산기가 무척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신문배달과 접시 닦는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을 가상히 여기던 아버지는 이와타 사토루가 전자계산기값의 반을 모우자 나머지 돈을 보태줘서 전자계산기를 구입할 수 있게 해준다.


휴렛 패커드의 공학용 전자계산기는 단순히 숫자계산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프로그래밍도 할 수 있을 정도의 초 미니컴퓨터였다. 이와타 사토루는 제대로 된 사용설명서도 없던 HP의 공학용 전자계산기를 철저하게 파고들기로 결심했다. 전자 계산기의 사용자 설명서를 읽어가면서 여러 게임 프로그램들을 개발했다. 그는 직접 자신이 짠 프로그램들을 휴렛팩커드 일본지사에 보내자 이를 본 관계자들은 이와타 사토루의 실력에 깜짝 놀라며 선물을 보내줄 정도였다.


전자계산기에 완전히 미쳐버린 이와타 사토루의 실력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발리볼이나 미사일 사격 게임 등을 개발할 수 있었다. 같은 수업을 듣는 학교 친구에게 자신이 만든 게임을 보여주자 정말 대단한 걸 해냈다면서 진심으로 칭찬하고 그를 격려했다.  이와타 사토루는 자신의 실력으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 자부심이 생겼고 이러한 자신감 덕분에 성격도 점차 활발하고 외향적으로 변해갔다. 이와타 사토루는 아직도 그때의 칭찬이야 말로 오늘날 자신을 있게 고백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친구가 있었던 건 행운이라고 말할 정도다. 


전자계산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던 이와타 사토루는 일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명문대인 동경공업대의 컴퓨터 공학과에 지원해서 합격을 한다. 하지만 1978년도만 해도 컴퓨터가 별로 보급되어 있지 않아서 컴퓨터 공학과의 교육수준도 별로 그리 높지 않았다. 학교의 수업자체가 이와타 사토루가 알고 있는 것 보다도 뒤떨어 졌었다. 처음에는 학교친구를 규합해서 스터디를 하려고 했지만 친구들은 학교 수업을 받는 것만으로도 벅차했다. 결국 이와타 사토루는 혼자서 컴퓨터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코모도어사의 PET 컴퓨터를 구입한 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혼자서 하는 것은 아무래도 재미가 없었다. 고등 학교시절 친구가 옆에서 응원을 해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도 일취월장했다고 생각하던 이와타 사토루는 그런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 도쿄의 대표적인 상업 중심지역중에 하나인 이케부쿠로역에 있는 세이부 백화점의 컴퓨터 판매점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당시 컴퓨터 판매점은 단순히 컴퓨터만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컴퓨터 고수들이 모여서 서로의 정보를 교환하는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진정한 고수들은 자신이 직접 짠 컴퓨터 프로그램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와타 사토루는 매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컴퓨터로 프로그래밍 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 앞에 사람들이 뭔가 잘못하면 지적을 해주고 쉽게 설명을 해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실력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컴퓨터 판매점의 직원 중 한 명이 영화 스페이스 오딧세이 2001에 등장하는 컴퓨터에서 이름을 딴 HAL 연구소라는 소프트웨어 회사를 창업하게 된다. 이때 이와타 사토루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점원은 회사에서 개발 업무를 맡아달라면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였다. 1980년 당시 대학교 2학년생이었던 이와타 사토루는 어차피 학생으로써 동아리 활동을 한다는 생각으로 HAL 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정한다.  HAL 연구소는 아키하바라의 맨션에서 한 명의 정직원과 여섯 명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시작하였다. 아르바이트 생이었지만 이와타 사토루는 개발할 제품의 계획을 세우고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는 등 회사 개발팀의 실질적인 리더가 되었다. 이와타 사토루의 첫 번째 작품은  당시 텍스트만 표시되었던 컴퓨터에 그래픽이 표현가능 하도록 만들어주는 PCG라는 주변기기를 만들었고 여기에 대응하는 게임 소프트웨어를 제작하였다. 


이와타 사토루는 적은 임금을 받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일 자체가 너무나 좋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프로그래밍의 세계에 더욱 빠져 들어갔다. 결국 이와타 사토루는 학교생활보다는 HAL 연구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일에 매달렸다.  


대학 졸업 때가 다가오자 대학교 친구들은 모두 대기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와타 사토루는 망설일 것도 없이 정직원이 다섯 명밖에 없었던 HAL 연구소의 정직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일류대학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작고 초라한 벤처기업인 HAL 연구소에 들어가자 그의 아버지는 6개월을 넘게 대화도 나누려 하지 않을 정도로 화를 냈다. 가족들은 이와타 사토루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고 생각 할 정도로 그의 HAL 연구소행은 대단히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스스로 가족 역사중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었다고 칭할 정도의 충격을 주면서까지 굳이 왜  HAL 연구소를 선택했을까?  이에 대해 게임 개발자들의 컨퍼런스인 GDC 2006에 참가한 이와타 사토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게임의 프로그래머이자 엔지니어였으며 디자이너였고 마켓터였습니다. 또한 음식을 주문하고 청소를 도왔지요.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죠”


 이와타 사토루는 명예와 돈보다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자신이 만든 물건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전형적인 장인의 피가 흐르는 인물이었다. 결국 이러한 그의 성향이 닌텐도 최초로 가족이 아닌 인물로 최초의 전문 경영인에 등극할 수 었던 원동력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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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회사에서 세계 최고 게임회사로 변신시킨 야마우치 히로시는 시대가 변한 만큼 새로운 리더쉽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21세기가 오면 은퇴를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많은 언론에서는 그의 후계자와 관련된 여러 예상들이 쏟아졌다. 가장 강력한 후보는 야마우치 히로시의 데릴사위이자 닌텐도 어메리카의 사장이었던 아라카와 미노루였다.  1946년 교토의 부유한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난 아라카와 미노루는 교토대학을 졸업하고 MIT 대학을 유학한 전형적인 엘리트였다.  파티에서 첫눈에 반한 야마우치 히로시의 딸 요코와 결혼을 한 후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원래부터 아라카와 미노루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야마우치 히로시는 끈질기게 닌텐도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의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사이가 나뻤던 요코는 남편이 닌텐도에서 일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일에 바뻤던 야마우치 히로시는 가정일에 소홀했는데 자신의 남편도 아버지처럼 일에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평소 야마우치 히로시의 원대한 비전에 호의를 품고 있던 아라카와 미노루는 닌텐도가 미국에 지사를 설립하자 사장직을 받아들인다. 그후 아라카와 미노루는 미국시장에서 패미컴과 슈퍼패미컴 그리고 포켓몬등을 대성공 시킴으로써 일본의 닌텐도를 세계의 닌텐도로 만든 공신이 되었다.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직원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으며 다른 일본인들과 다르게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언론들과도 관계가 좋았다. 특히 미국시장에서의 활약덕분에 북극에서도 아이스 크림을 팔 수 있는 세일즈맨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실제로 각종 경영관련 상들을 수상했다.


그런데 정작 2002년 야마우치 히로시는 게임회사 닌텐도의 개국공신이자  사위인 아라카와 미노루를 회사에서 퇴임 시킨다. 그리고 닌텐도로 부임한지 단 2년 밖에 안된  이와타 사토루를 사장으로 임명하며 많은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특히 그가 새롭게 발표한 집단 지도체제는 파격 그자체였다.  집단 지도 체제는 사장인 이와타 사토루 이외에도 아사다 아츠시, 모리 히토시, 다케다 겐요, 하타노 신지, 미야모토 시게루 등 6명의 이사들이 공동 대표권을 가지고 회사의 중요한 결정들을 합의를 통해서 결정하는 지도체제이다. 


아사다 아츠시는 회사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 보다는 키잡이의 역할을 하고 모리 히토시는 경영총괄 본부장으로써 회사의 재무문제를 전담한다. 영업본부장인 하타노 신지는 주로 라이센스 업무를 담당하면서 다른 회사와의 업무제휴를 추진하는 일을 하였는데 한국에 지사를 세울 때 역시 하타노 신지가 직접 일을 추진하였다. 마리오와 젤다의 전설을 창조한 게임의 신 미야모토 시게루는 정보개발 본부장으로써 소프트웨어 개발을 책임지고 종합 개발 본부의 다케다 겐요는 하드웨어 개발을 총괄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역할 분담 자체는 IT 업체로서는 훌륭한 조직 체제이지만 문제는 중요 안건에 대해서 합의를 전제로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  이는 야마우치 히로시가 지난 50여년을 넘게 혼자서 하던 일을 여섯명이 분담 분담하는 것으로 회사운영이 둔해지는 역효과를 가지게 될 것이 뻔했다. 


원래 닌텐도는 야마우치히로시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원맨회사였다. 닌텐도 내에서는 그의 말 한마디가 법이요 진리였으며 야마우치 히로시가 목표를 세우면 직원들은  그 목표를 세우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야마우치 히로시가 화를 내면 직원들은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람처럼 좌절하였고 한마디 칭찬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것보다 즐겁고 기쁜 것이 없다고 할정도로 야마우치 히로시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통치자였다. 50년을 넘게  닌텐도는 야마우치 히로시라는 원맨체제에 익숙했던 만큼  새로운 사장도 야마우치 히로시 처럼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해야 할텐데 여섯명이나 되는 이사가 공동으로 대표권을 가지는 집단 체제는 많은 전문가들의 우려를 살수 밖에 없었다. 


원래 IT 업계는 발전속도가 빠른 만큼 그 어떤 분야보다도 의사결정 역시 빨라야 한다. 그래서 IT 업계는 강력한 리더쉽을 발휘하는 CEO가 회사를 장악하기 마련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빌게이츠가 대표적인 인물로써 그들은 회사를 허브 앤 스포크(hub & spoke)방식으로 경영했다. 허브앤 스포크방식은 수레 바퀴의 중앙축에 살이 연결되어 있듯이 CEO가 회사 전체의 중앙통로가 되어서 각 사업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말한다. 실제로 스티브 잡스와 빌게이츠는 회사의 허브 역할을 하면서 사업을 직접 챙겼고 이를 통해서 효율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만들어냈다. 


닌텐도 역시 야마우치 히로시를 중심으로 허브 앤 스포크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회사였고 대부분의 IT뿐만 아니라 게임 회사 CEO들은 야마우치 히로시와 같은 비슷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플레이스테이션의 총 개발 책임자였던 구타라기 겐 역시 게임사업을 위해서는 확실한 주도권과 통제권을 확보한 리더의 중요성을 설파하였다. 플레이스테이션 사업을 처음 진행할 때는  임원들의 견제로 일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지만 구타라기 겐이 회사로부터 전폭적인 임무와 권한을 약속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게임사업도 가속도를 내고 탄력을 얻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후 게임회사에서는 집단 지도 체제는 안된다고 단언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야마우치 히로시가 3년을 넘게 고민한 끝에 내놓았다는 이와타 사로투 중심의 집단 지도 체제는 당초의 예상과 다르게 완벽하게 성공하였다. 이와타 사토루 사장 특유의 화합과 결단의 리더쉽으로 6인의 집단 지도체제는 환상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 집단 지도체제가 시작된 2002년 이후 닌텐도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5041억이었던 매출이 어느덧 2억엔을 넘어서면서 무려 네배가 넘는 초고속 성장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어느덧 이와타 사토루는 일본의 스티브 잡스라는 칭송을 듣고 있으며 야마우치 히로시의 마지막 결단은 그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다면서 어느덧 찬양으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왜 야마우치 히로시는 수십년간 닌텐도에 충성한 여러 공신들을 제쳐두고 외부인사 그것도 하청업체 출신인 이와타 사토루를 사장으로 임명했을까? 야마우치 히로시는 그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게임산업에 완벽한 이해를 가진 인물로 한번도 자신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와타 사토루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것만으는 뭔가 부족하다. 이와타 사토루가 닌텐도에 들어 오기까지의 삶의 궤적을 통해서 그가 어떻게 닌텐도의 하청업체 직원에서 사장이 될수 있었는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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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등불2008.03.20 01:51


What's Next 애플 & 닌텐도 - 10점
김정남 지음/길벗



저자의 거침없는 분석과 명쾌한 주장을 통해 오늘날 IT 기업이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요구되는 마인드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애플의 아이팟, 닌텐도의 게임기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 회사원에 이르기까지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글로벌 히트 상품 뒤에 창조적인 기업 경영으로 가치 혁신을 이룬 애플과 닌텐도, 두 회사의 가슴 뛰고 숨막히는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 책은 넘버원이 아닌 온리원, 제품이 아닌 문화, 최고가 아닌 승리를 외치는 두 기업의 모든 것을 담아낸 책이다.  
 
 
   
 
 
 왜 우리는 애플과 닌텐도에 열광하는가?

‘매출 240억 달러-애플, 시가 총액 63조 2천억 원-닌텐도’
우리는 단순히 애플과 닌텐도라는 기업의 매출 규모나 순위를 보지 않더라도 이들이 만든 제품이 전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대체 이들의 원동력이 무엇이며 또 앞으로의 행보는 어떨까?

?WHAT'S NEXT 애플&닌텐도?는 애플과 닌텐도라는 기업이 일등 보다 최고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애쓰는 과정과 제품과 더불어 문화까지 판매하는 고난이도의 마케팅 전략을 소개하면서 전 세계인이 왜 이들 제품에 열광하는지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은 카리스마 넘치는 CEO, 경영 혁신, 창조적 기업 문화, 무한 도전 정신, 새로운 감각의 디자인, 감성적 마케팅 등 어느 것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애플과 닌텐도의 성공 요인을 말하면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명하고 현대 기업이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이며 여기에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Fun! Creative! Innovation! 

왜 우리는 애플과 닌텐도에 열광하는가?

‘매출 240억 달러-애플, 시가 총액 63조 2천억 원-닌텐도’
우리는 단순히 애플과 닌텐도라는 기업의 매출 규모나 순위를 보지 않더라도 이들이 만든 제품이 전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대체 이들의 원동력이 무엇이며 또 앞으로의 행보는 어떨까?

?WHAT'S NEXT 애플&닌텐도?는 애플과 닌텐도라는 기업이 일등 보다 최고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애쓰는 과정과 제품과 더불어 문화까지 판매하는 고난이도의 마케팅 전략을 소개하면서 전 세계인이 왜 이들 제품에 열광하는지 알기 쉽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은 카리스마 넘치는 CEO, 경영 혁신, 창조적 기업 문화, 무한 도전 정신, 새로운 감각의 디자인, 감성적 마케팅 등 어느 것 하나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애플과 닌텐도의 성공 요인을 말하면서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명하고 현대 기업이 갖춰야 할 덕목이 무엇이며 여기에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지도 알려준다.


Fun! Creative! Innovation!

디지털 시대를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로 ‘재미’, ‘창조’, ‘혁신’을 꼽을 수 있는데 이 표현이 가장 잘 들어맞는 기업으로 애플과 닌텐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이들 기업이 유행을 ?i는 불나방처럼 어느 한 순간 시대를 잘 만난 요행으로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변화했기 때문에 이뤄낸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변화와 혁신은 기다리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가치 혁신을 이루고 기존의 벽을 허무는 무모함이 있어야 성취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디지털 시대를 이끄는 두 거인, 애플과 닌텐도의 열정을 통해 배울 수 있다.

?WHAT'S NEXT 애플&닌텐도?는 넘버원이 아닌 온리원, 제품이 아닌 문화, 최고가 아닌 승리를 외치고 창조적인 기업 경영으로 가치 혁신을 이룬 두 회사의 가슴 뛰고 숨 막히는 이야기를 잘 풀어냈다.


즐거움과 감성을 파는 기업을 통해 가능성을 보다!

‘08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은 바로 애플' -
‘애플, 전 세계에서 가장 창의력이 있는 기업 3년간 연속 1위’ -
‘DSL이 11월 미국 시장에서만 153만대, 시간상으로 5초에 1대씩 팔려’ - <뉴욕타임즈>
‘전 세계가 없어서 아우성’ - <스포츠서울>, ‘닌텐도 찾아 삼만리 떠난 아이들’ - <오마이뉴스>

세계의 모든 기업이 ‘혁신’을 도전 과제로 삼고 있지만 결국 성공하는 것은 소수이다. 왜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고민을 하면서 같은 시도를 하는데 왜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하는가?

?WHAT'S NEXT 애플&닌텐도?는 창조와 혁신에 성공한 가장 대표 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애플과 닌텐도를 집중 분석하면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애플의 아이팟, 닌텐도의 DS 게임기와 같은 글로벌 히트 상품이 나오기까지 그들의 고민과 그들이 지키고 버려야했던 것이 무엇인지, ‘다르게 생각하기’, ‘밥상 뒤집기’, ‘해적 정신’ 등을 강조하는 독특한 기업 문화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등을 알아봄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새로운 시각과 도전 정신에 자극 받을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애플과 닌텐도가 겪어온 세월과 현재의 실적을 얘기하면서 그들의 성공 신화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테이블 위에 스타벅스 커피 한 잔, 손에는 닌텐도 게임기, 귀에는 애플 아이팟을 꽂은 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요구에 대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기민하게 대처해야 하는 우리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내용을 담고 있다.
 


 
 
 
 
 프롤로그 : 디지털 세상을 이끄는 작은 거인들

1. 기적은 무모함에서 시작된다
극과 극의 환경, 하지만 같은 성격
여행을 통해 새로운 인생에 눈을 뜨다
고정관념은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긴다
기획자의 모범, 스티브 잡스와 야마우치 히로시

2. 시장이 커지면 더 강력한 경쟁자가 도전한다
가치를 보는 안목과 실행력이 승부를 가른다
판을 바꾸려는 새로운 도전자들
시장이 커지기를 기다리는 대기업들의 속성
애플과 닌텐도, 2인자의 자리로 추락하다

3. 그 누구도 마이크로소프트를 막을 수 없다
디지털 시대의 황제, 마이크로소프트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패배를 모르는 기업, 마이크로소프트
애플과 닌텐도를 울려버린 마이크로소프트

4. 상황이 바뀌면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모든 변화는 회사의 삼두체제에서 시작된다
실패 속에서 교훈을 얻어 변화를 모색한다
적군과 아군을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시장 성공의 새로운 황금률을 찾아라!

5. 넘버원이 아닌 온리원을 추구한다
좀 더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브랜드 전략
제품에서 문화가 되다
영혼을 불어넣는 디자인
유대감을 높여주는 커뮤니티

6. 최고의 기업에는 승리하는 기업 문화가 있다
최고의 인재만을 뽑는다
식료품점 같은 기업 문화
다르게 생각하기
밥상 뒤집기
균형을 추구하다

에필로그 |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부록
한눈에 보는 애플 연혁
한눈에 보는 닌텐도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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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
닌텐도 이야기2008.03.20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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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텐도 연혁

1989년 야마우치 후사지로는 일본 교토에 화투와 트럼프 같은 카드제조회사인 닌텐도를 창업한다.

1927년 닌텐도를 게임시장에 진출시키는 야마우치 히로시가 태어난다. 어린시절 야마우치 히로시의 아버지 키미는  집을 나가 행방불명된다.

1929년 야마우치 세키요가 야마우치 후사지로의 뒤를 이어 사장이 된다. 야마우치 세키요는 야마우치 히로시의 할아버지로 야마우치 히로시를 실질적으로 양육한다.

1933년 야마우치 세키요는 교토지역에 있던 카드회사를 모두 합병한다. 그후 카드의 원재료인 종이회사를 인수하는등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1945년 와세다 대학의 법학과 학생이었던 야마우치 히로시는 지역의 명문가 출신인 이나바와 결혼을 한다.

1947년 와세다 대학의 재학중 할아버지인 야마우치 세키요가 쓰러지자 학교를 휴학하고 교토로 돌아온다.

1949년 야마우치 세키요의 뒤를 이어 23살의 야마우치 히로시가 사장이 된다. 야마우치 세키요는 야마우치 히로시의 뜻에 따라서 닌텐도에 근무하던 모든 친척들을 회사에서 그만두도록 한다. 초기 젊은 사장 야마우치 히로시에 대한 반말이 컸으나 야마우치 세키요의 적극적인 지원과 야마우치 히로시의 탁월한 경영 성과로 모든 것을 잠재우고 회사 내에 강력한 원맨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1953년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던 카드생산을 기계를 통한 대량 생산체제를 구축하다.
종이가 아닌 플라스틱 재질의 카드를 선보여 일본제일의 카드회사로 거듭나다.

1956년 야마우치 히로시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다. 디즈니 본사에서 캐릭터 사용권을 합의하고 당시 세계 최고의 카드회사였던 플레잉 카드사를 방문한다. 하지만 회사의 사정에 크게 실망하게 되고 카드 사업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된다.

1959년 디즈니사의 캐릭터를 이용한 카드를 선보인다. 닌텐도는 텔레비전 광고등의 대규모 프로모션을 진행하여 60만개가 넘는 카드세트를 판매하는 대성공을 거둔다.

1959년 오사카와 교토의 제2 주식시장을 통하여 기업을 공개한다.

1963년 닌텐도는 경영 다각화를 위하여 택시회사, 러브호텔, 인스턴트 식품산업에 진출하지만 실패를 거듭한다.

1964년 닌텐도는 완구업에 진출하여 장난감 게임기인 래빗 코스터를 발매한다.

1967년 공장의 유지보수를 맡던 엔지니어 요코이 군페이의 아이디어인 울트라 핸드가 발매되어 100만개가 넘는 큰 인기를 얻는다.  동경 올림픽 이후의 불황으로 경영상에 어려움을 겪던 닌텐도에 큰 힘이 되어준다. 이후 야마우치 히로시는 카드회사였던 닌텐도는 역시 재미를 아는 회사라고 생각해서 장난감산업에 집중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70년 샤프의 기술협조로 광선검을 선보이다. 광선검의 대히트를 통해서 재미와 기술의 결합의 중요함을 깨닫는다.

1970년 오사카와 교토의 제1 주식시장에 정식으로 주식을 상장한다.

1973년 닌텐도는 사업 확장의 일환으로 볼링장과 사격장등을 인수하여 사업확장에 박차를 가한다.

1972년 세계 최초의 비디오 게임기 마그나 복스발매되다.

1975년 닌텐도는 세계최초의 비디오 게임기인 마그나 복스를 미국으로부터 수입해서 판매한다.

1977년 마리오와 젤다의 아버지 미야모토 시게루가 닌텐도에 입사하다.
닌텐도는 미츠비시와 함께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인 Color TV 6를 발매한다.

1978년 요코이 군페이는 정식으로 게임 사업부의 팀장이 되다. 얼마후 닌텐도는 아케이드 게임시장에 진출하여 오델로를 개발한다.

1980년 미국 뉴욕에 닌텐도 최초의 해외지사인 닌텐도 어메리카가 설립된다. 책임자는 야마우치 히로시의 사위인 아라카와 미노루였다.
기차안에서 회사원들이 전자계산기를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휴대용 게임기 게임 & 워치가 발매된다. 오일쇼크로 인해서 빚더미에 올랐던 닌텐도에게 큰 도움이 된다.

1981년 야마우치 히로시는 일본에서 히트한 레이더 스코프를 미국에서 판매하기로 결정한다. 게임의 성공을 장담했던 그는 2천여대의 게임기를 미국으로 보내지만 시장에서의 반응은 냉담하였고 결국 모두 재고로 남게 된다. 재고품의 롬 부분만 교체하면 다른 게임으로 바꿀 수 있다는데 착안하여 야마우치 히로시는 미야모토 시게루에게 새로운 게임 제작을 지시한다. 이때 개발한 게임이 동키콩으로 당시 아케이드 게임 역사상 최다 판매량인 6만 5천개를 기록한다.

1982년 닌텐도는 뉴욕에 있는 미국 지사를 워싱턴주에 있는 시애틀로 옮긴다.

1983년 일본에서 가정용 게임기 패미컴이 발매되어 두달만에 50만개를 넘게 판매된다. 일본에서의 성공을지켜본 야마우치 히로시는 패미컴을 미국에 진출시키기로 결정한다.
닌텐도는 세번째 해외지사로 캐나다의 밴쿠버에 지사를 연다.
게임워치의 판매를 중지한다.

1985년 패미컴이 미국의 뉴욕 일부지역에서 발매된다..

1986년 미국 전지역에서 패미컴이 199달러에 정식 발매된다. 슈퍼마리오가 출시되어 패미컴의 킬러 컨텐츠 역할을 한다.  슈퍼마리오는 현재 1억 7천만개가 넘는 판매량으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게임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유럽에 닌텐도 지사를 마련하여 패미컴을 발매한다. 1989년에 판매대수 2백만대를 돌파하며 유럽에서 입지를 다진다.

1087년 야마우치 증권과 손 잡고 집에서 주식거래를 할 수 있는 홈 트레이드 서비스를 개시하는데 패미컴을 단말기로 사용한다.
미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장난감으로 패미컴이 뽑히다.
젤다의 전설이 미국에서 처음으로 백만개 이상의 게임을 판 첫번째 게임이 되다.

1988년 세가에서 16비트 게임기 메가드라이브를 발매하다.

1989년 하나의 게임만 가능했던 게임 & 워치의 한계를 극복하고 팩을 바꾸면 새로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게임 보이가 출시된다.
미국에서 미키마우스를 제치고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리터로 마리오가 뽑히다.

1990년 6천만대가 넘게 팔린 패미컴의 후계기인 16비트 게임기 슈퍼패미컴이 일본에서 출시된다.
전국의 유저들이 네트워크로 같이 게임을 즐길수 있는 패미컴 통신망을 구축하다.
슈퍼패미컴은 크리스마스에가 가장 선물받고 싶은 선물에 뽑힌다.
최초로 게임기와 건강을 접목한 패미컴 휘트니스 시스템이 시작되다.

1991년 슈퍼패미컴이 미국에서 출시된다. 슈퍼패미컴은 4천 9백만대가 팔린다.
일본 최초로 사원 1인당 1억엔의 매출을 기록하다.
 한주당 배당액과 한주당 판매 가격에서 일본 최고의 업체에 등극하다.

1991년 한해 동안 500만대의 게임기를 판매하였는데 이는 일본에서 생산된 모든 VTR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이다.
일본 경제 신문이 뽑은 일본 최고의 우량기업 1위에 뽑히다.일본의 전자 전기 업체중에서

1992년 야마우치 히로시 미국 메이저리그의 야구단인 시애틀 매리너스를 인수하다.
닌텐도는 매출액 5,627억엔에 순이익 1,660억엔을 기록하는데 이는 일본의 전자업체중 1위이며 일본기업 전체로는 도요타 자동차와 NTT에 이어서 세번째로 많은 순이익이었다.
1995년 신개념의 3D 리얼리티 게임기 버추얼 보이 77만대가 판매되고 1년만에 철수한다. 게임보이로 닌텐도의 성공을 이끌었던 요코이 군페이는 이에 대한 책임으로 회사를 그만둔다.
소니가 처음 게임계에 진출하여 32비트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을 발매한다. 세가 역시 경쟁기종으로 세가 새턴을 내놓는다.

1996년 64비트 게임기 닌텐도 64가 발매되다. 닌텐도 64는 3천 2백 9십 3만대에 이르는 판매량을 기록하지만 게임시장의 왕좌를 소니의 플레이 스테이션에게 넘겨준다. 하지만 포켓몬 시리즈가 발매되어 게임보이 시장의 급격한 성장을 이루게 된다.

1998년 게임보이 컬러가 발매되어 닌텐도의 수익이 휴대용 게임기 시장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진다.

2001년 게임 보이의 후속버전인 게임보이 어드밴스가 발매되다.
128비트 게임기 게임큐브가 발매되다. 2천 백 6십만대가 판매되어서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에 이어 시장 점유율 3위에 오르게 된다.

74세의 야마우치 히로시가 사장자리에서 물러나고 상담역으로 자리를 바꾸다. 사장은 42세의 이와타 사토루였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하는게 아니라 미야모토 시게루 전무등의 6인이 함께 경영권을 가지는 집단 지도체제였다.

2003년 게임시장 진출이후 닌텐도 최초로 적자를 기록하다.

2004년 야마우치 히로시가 초기 아이디어를 제공한 닌텐도 DS가 149달러에 발매된다. 천만개가 넘게 판매된 두뇌트레이닝과 같은 킬러 콘체츠 덕분에 5천5백만개가 넘게 팔렸으며 2008년 현재도 역시 매진이 계속되고 있다.

2005년 닌텐도 DS에 WIFI 기능을 통하여 온라인 네트워크 서비스를 개시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차세대 게임기 엑스박스360을 정식으로 발매한다.

2006년 성능은 기존 엑스박스급이지만 새로운 형태의 컨트롤러를 선보인 신개념 게임기 위(Wii)가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 발매된다. 현재 위는 일본에서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중이며 월별 판매량에서도 엑스박스 360을 능가하면서 이미 차세대 게임기 시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상태다.
 한국에 닌텐도 지사를 설립하다.

2007년 한국에 닌텐도 DS를 발매하여 1년만에 80만대의 성공적인 판매량을 기록중이다.
 게임과 건강을 접목한 위핏이 일본에서 발매되어 초기물량 30만개가 판매되고 매진행렬이 기록중이다.
닌텐도 DS는 10월에 전세계 누적판매량이 5천만개를 돌파했다.
가정용 게임기 위는 턱없이 높은 수요로 인해서 공급부족 사태를 겪고 있는데 이로 인해서 닌텐도는 15억달러 정도 손해를 보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고 분석한다. 현재 닌텐도는 손님들에게 선불금을 받고서 예약을 받는 레인체크(Rain-Check) 제도를 시행하며 소비자들의 불만을 달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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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