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그로브는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1936년에 태어난다. 원래 이름은 안드라스  그로프(Gróf András )이고 앤디 그로브는 그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 바꾼 미국식 이름이다. 이다. 그로프라는 이름의 성은 원래 백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의 선조분이 백작의 재산관리인으로 일을 하면서 주위 동네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한 별명이었다.  앤디 그로브의 아버지 조지 그라프는 치즈나 야쿠르트 그리고 버터 같은 우유 가공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운영중이었다. 그는 직접 제품을 상점에 배달했는데 거래를 했던 가게집의 딸에게 첫눈에 반한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로 당시 여성으로써는 드물게 대학의 예비학교 격인 김나지움을 나온 피아니스트였다. 둘은 결혼을 하게 되고 이들 사이에 낳은 유일한 자녀가 바로 앤디 그로브였다.  


사업에 성공한 아버지 덕분에 그의 집안은 가정부가 있을 정도로 유복했다. 그는 어린 시절 몸이 약했다. 특히 4살 때 심장수술을 받던중에 부작용으로 인하여 50%의 청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으로 잘 극복하면서 유아기를 보낸다. 행복한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 아버지는 2차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헝가리의 의용군이 되어서 전쟁터로 나간다. 하지만 전쟁중에 행방불명이 되어서 실종자 처리가 된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독일군이 헝가리를 침공하면서 앤디 그로브의 수난이 계속되었다. 유대인인 그는 지하대피소에서 숨어지내야 했다. 친척들은 독일군에 붙잡혀 홀로코스트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였다. 앤디 그로브는 자신이 철저하게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어야 했으며 어머니 역시 서로 아는 척을 해서는 안되었다.


 어느날 앤디 그로브는 친했던 친구에게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게 되면서 친구 아버지에게 조사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얼마후 소련군이 독일군을 격퇴하면서 무사히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소련군 역시 헝가리의 또 다른 점령군이었다. 아버지가 없었던 앤디그로브와 그의 어머니는 고달프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1945년 4월이 되어서야 소련군도 철수하고 앤디그로브는 2학년을 뛰어넘고 3학년이 되어 학교로 돌아간다. 이때 마침 죽은줄로만 알았던  아버지가 3년만에 돌아오는 감격을 맛보게 된다.  소련군 프로로 혹독한 날들을 지냈던 그는 오직 아내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온갖 고난을 이겨낸다. 하지만 그는 포로수용소 생활로 인하여  몸이 피폐해졌고 나중에는 폐병으로 고생하게 된다. 앤디 그로브의 아버지는 비록 중학교 중퇴였지만 사업적 재능이 뛰어났다. 아버지는 다시 사업을 일으켰고 곧 그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회복하게 된다. 


 경제적 감각만큼이나 시사와 정치등의 잡학박사였던 그의 아버지 조지는 2차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미국이 앞으로 국제적인 영향력이 커질 것임을 예감하고 앤디 그로브에게 영어과외를 시키기로 결정한다. 가정교사를 구하기 위해서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금목걸이를 팔아야 했다.  비록 앤디 그로브는 정작 영어공부가 싫었지만 아버지의 이런 선택은 나중에 그가 미국으로 유학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아버지의 교육열이 결국 앤디 그로브의 오늘을 만들어 냈다. 


피아니스트 출신인 어머니는 교사를 고용해서 피오노 레슨을 받도록 했다. 앤디 그로브는 피아노역시 배우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강권으로 억지로 수업을 받아야했다. 당시 배운 피아노는 그가 지금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뮤지컬을 공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앤디 그로브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수학도 따로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학교를 다닐 때 수학을 가장 좋아했는데 그래서 앤디 그로브의 수학성적에 각별하게 신경을 썼고 과외까지 시켰다. 이와 같은 부모님들의 열성적인 교육관 덕분에 그는 학교에서 알아주는 우등생이었다.


 선생님들은 앤디 그로브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학부모 모임에서 선생님들은 공개적으로 앤디 그로브를 모범적인 학생으로 칭찬하였고 모임에 참석한 그의 부모님들은 항상 뿌듯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의 친구들은 앤디그로브가 공부만 잘하는 학생이라는 인식을 가졌는데 그는 이러한 선입관을 깨기 위해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는 해군 제독 호레이쇼 혼블로어를 소재로한 소설을 감명깊게 읽었다. 이 책을 계기로 그는 작가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한다. 어느 날 우등생이었던 친구가 방황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다.


 소설을 완성한  그는 학교내의 독서모임에 발표하여 일약 교내의 스타로 등극한다. 지금도 여러 권의 저서를 베스트셀러에 올려 놓으면서 뛰어난 문필가로 명성이  높은 그는 신문사에 기사를 쓰는 아마추어 저널리스트로 활약하기 까지 한다. 또한 여자와의 데이트를 꿈꾸며 그는 댄스학원을 다녔으며 펜싱과 수영등 다양한 운동을 즐겼다. 그가 특히 좋아했던 것은 오페라였다. 공연장에서 카르멘을 관람한 후에 완전히 뮤지컬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그에게 최고의 즐거움은 뮤지컬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장래에 화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여러가지의 용액을 합쳐서 전혀 다른 새로운 물체를만드는 것에 그는 매료되었다.  화학의 세계는 그를 마술사로 만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매일 집에서 화학실험을 하면서 놀았고 어느날은 직접 다이나 마이트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결국 그는 뛰어난 학업 성적이 인정받아서 헝가리 최고의 명문인 부다페스트 대학교의 화학과로 진학한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했던 화학분야를 대학에서 공부하게 된 그는 마음이 맞는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귀면서 최고의 시간을 가진다.


 그는 틈틈히 성악을 공부했고 학교에서 공연을 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카누를 하면서 살을 뺀 그는 운동도 더욱 열심히 하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내던 어느날 헝가리의 정치상황이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암울한 시기를 겪게 된다. 당시 헝가리는 공산국가로써 소련과 각별한 관계였다. 이에 헝가리의 시민들은 소련과 결별하고 새로운 민주화를 이루자는 시위를 벌였다. 앤디 그로브도 당시의 민주화 시위에 참석했다. 하지만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하면서 이른바 10월의 민주혁명은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이미 2차세계대전으로 전쟁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던 그의 부모들은 소련군들이 헝가리 여러지역을 점령하자 아들인 앤디 그로브의 미래를 위해 해외로 도피 시킬 생각을 한다. 처음 앤디 그로브는 부모님을 두고서 떠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상황이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자 결국 그는 망명을 선택한다.  앤디 그로브는 미국에 있는 고모집으로 가기로 결정한후에 도피계획을 세운다. 당시 헝가리사람들은 대규모로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사례가 많아서 심야시간에는 통행금지였고 검색도 강화되었다. 당시 정국이 불안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탈출에 실패하면 앤디 그로브는 필연적으로 신변상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앤디 그로브는 국경근처에 가본적도 없기 때문에 탈출을 위한 루트를 알수가 없었다. 기차를 운전하는 사람을 포섭해서 길을 안내받기로하고 돈을 건냈지만 사기를 당하고 만다. 하지만 다행히 새로운 가이드를 만나게 되고 그가 지시하는 길을 통해서 국경근처에 가게 된다.  불빛이 보이는 집을 향해서 달리라는 가이드의 말을 듣고서 그는 전속력으로 숲속을 달렸으며  드디어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당도하게 된다. 하지만 탈출의 기쁨도 잠시였다. 그는 미국이외에 아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난민으로 인정받아야만 했다. 난민은 미국의 관계자들과의 면접으로 결정되었다. 아버지가 어린시절부터 공부를 시켰던 영어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앤디 그로브의 영어실력이 난민으로 인정받기에는 좋은 조건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난민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결과발표를 본 그는 출구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은 느낌이었다. 충격속에서 그는 미국 관계자들을 향해서 분노를 표출했으며 제발 미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큰소리로 호소하였다. 그의 그런 모습에서 열정을 느낀 관계자들은 기회를 주기로 결정한다. 드디어 앤디 그로브는 1956년 2주간의 항해 끝에 미국의 뉴욕항에 도착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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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Intel)은 전세계 60개국의 나라에 9만 9천명이 고용되어 있으며 380억달러가 넘는 매출에 120억달러라는 높은 순이익을 자랑하는 세계최고의 반도체 회사이다.  특히 펜티엄 시리즈를 대표로 한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주력산업으로 현재 개인용 컴퓨터의 70%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그밖에 플래쉬램, 네트워크 카드, 그래픽 칩, 메인보드 칩셋등 컴퓨터의 핵심 부품들을 개발 연구하며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IT 기업이다. 지금은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유명하지만 사실 인텔은 세계 최초로 메모리를 개발한 회사로 70년대 초반만해도 전세계에서 메모리 점유율 100%에 이익률이 50%가 넘는 회사이기도 했다. 하지만 80년대에 일본 업체들이 싼 가격으로 메모리 시장에 대량 공습으로 진격해오자 주력 업종을 마이크로 프로세서로 바꾸었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인텔은 미국 벤처산업의 총본산이라고 하는 실리콘 밸리의 대부이자 단단한 버팀목이다. 이번 장에서는 인텔의 창업공신 앤디 그루브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우선 세계 디지털 산업의 혁명을 불러 일으킨 인텔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인텔의 역사는 단순히 미국 디지털의 역사가 아니라 세계 디지털의 역사이기도 하며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를 만들어낸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인텔의 창업과정과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는 건 디지털의 어제와 오늘을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해준다.


디지털의 역사의 신기원 – 트랜지스터


트랜지스터는 전기신호를 증폭해주는 장치이다. 라디오에서 방송국의 전기신호를 잡아서 소리로 증폭시켜줄 때 바로 트랜지스터가 사용된다. 마이크로 입력되는 소리를 스피커로 증폭해서 출력시켜주는 것도 바로 트랜지스터의 역할이다. 트랜지스터는 컴퓨터에도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다. 과거 애니악 컴퓨터는 실험실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전자신호를 진공관으로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랜지스터가 이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컴퓨터의 소형화를 이루어 냈다. 기술의 발전으로 트랜지스터의 크기는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 마이크로 프로세서에서 트랜지스터는 0과 1의 전기신호를 받아내는 역할을 한다. 마이크로프로세서안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 숫자에 따라서 성능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텔을 창업한 고든 무어(Gordon Moore )는 1년 6개월마다 CPU속에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숫자가 두배씩 늘어 난다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 18개월의 주기를 가지고 CPU안에 집적되는 트랜지스터는 두배씩 늘어났고 성능도 두배씩 발전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무어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1947년 트랜지스터는 벨연구소에서 일하는 윌리엄 쇼클리(William Shockley)의 책임아래 존 바든(John Bardeen) 그리고 월터 브래튼( Walter Brattain) 주도로 발명되었다. 트랜지스터의 발견은 단순히 컴퓨터 역사가 아니라 전자산업 더 나아가 인류 전체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던 만큼 그들은 1956년도에 모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연구 책임자였던 윌리엄 쇼클리는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공로로 승진과 더 많은 성과급을 원했지만 벨 연구소는 그의 요구조건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결국 윌리엄 쇼클리는 연구소를 그만두고 상업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프로젝트를 새롭게 진행 발전 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때 마침 이 소식을 들은 스탠포드 대학의 프레드릭 터먼(Fredrick Terman) 교수가 윌리엄 쇼클리를 찾아가 만나게 된다. 프레드릭 터먼 교수는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토대를 구축한 벤처기업의 아버지이다.


 1950년대만 해도 미국 동부와 서부는 기업의 편중현상이 심각하였다. 동부는 뉴욕을 중심으로해서 미국의 모든 대기업들이 몰려있어서 많은 일자리가 있었던데 반하여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지역은 변변한 일자리하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스탠포드의 교수인 터먼 교수는 애써 열심히 가르친 제자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하여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인재들이 모두 동부지역으로만 몰려가니 서부지역은 항상 제자리 걸음이고 빈곤의 악순환이었다. 그래서 터먼교수는 스탠포드 대학 주변에 연구시설을 마련하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이들이 부담없이 회사를 창업해서 훌륭한 기업가로 성장하도록 돕고 싶었다.  그가 첫번째로 길러낸 기업인이 바로 윌리엄 휴랫과 데이빗팩커드 였다. 이 둘은 학생시절부터 성실한 학업태도와 뛰어난 머리로 터먼교수의 눈에 들었다. 터먼교수는 연구공간을 마련해줄 테니 거기서 만든 제품을 상업화해보라고 권유한다. 둘은 회사이름에 자신들의 이름을 차례로 넣기로 하고  동전을 던져서 순서를 정하기로 했다. 동전이 앞면을 가리키며 떨어지자 휴렛의 이름이 앞에 먼저 쓰기로 결정됐다. 이것이 바로 실리콘 밸리 벤처 1호로 인정받는 HP(Hewlett-Packard)의 시작이다. 538달러의 자본금으로 어느 허름한 창고에서 시작된 HP는 현재 15만명의 고용인원에 매출은 무려 890억달러를 바라보는 엄청난 기업으로 발전했다. HP는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발생지로 인정받고 있을 정도로 그 역사적 의미가 대단히 크다. 


터먼교수는 1930년대에 창업된 HP가 어느정도 성과를 냈던 1950년대에 이르자 좀더 구체적으로 벤처기업을 육성시킬 계획을 세운다.  스탠포드 대학교 주변의 부지를 기업에게 싼값에 제공하면서 입주를 적극 권유하였고 학생들의 창업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였다. 스탠포드 대학의 뛰어난 연구인력과 학생들을 기업에 제공하는 산학협력 체제를 무기로 해서 기업들을 학교지역 주변에 유치하자는 것이 터먼교수의 생각이었다.  윌리엄 쇼클리와의 만남도 스탠포드대학의 교수직 제안과 함께 대학 주변에 회사를 창업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그 만남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서 터먼교수의 뜻대로 윌리엄 쇼클리는 벨연구소가 있는 뉴저리를 떠나서 캘리포니아 스탠포드 대학의 교수가 되는 동시에 1956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창업했다.


노벨상 수상자가 회사를 만들었다고 하자 서부지역의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터먼교수가 기대했던 그런 효과였다. 하지만 윌리엄 쇼클리는 학문적인 깊이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상업성을 갖춘 제품개발에는 역부족이었다. 윌리엄 쇼클리가 연구한 분야는 트랜지스터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계속되는 실패를 거듭했다. 문제는 윌리엄 쇼클리는 연구에 뛰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인간관계와 리더쉽은 부족한 사람이었다. 상품 개발은 늦어지면서 회사의 수익은 나지 않고 연구비만 들어가게 되자 윌리엄 쇼클리 교수는 상습적으로 부하직원들에게 화풀이를 하였다. 이때 회사의 운영에 불만을 품은 여덟명의 직원이 있었다. 평생토록 윌리엄 쇼클리는 그들을 8인의 배신자라고 불렀던 바로 그 사람들이다. 


인텔과 앤디 그로브 


1957년 회사를 그만둔 8명의 직원들은 비록 상용화 제품은 만들어 내지 못했지만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공동된 목표를 세울수 있다면 세상을 깜짝놀래킬 상품을 개발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서부지역에는 이들 여덟명을 받아줄만 한 회사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8인의 배신자들은 회사를 새로 창업하기 위해서 투자자들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동부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는 페어차일드(Fairchild) 그룹과 접촉하게 된다. 페어차일드의 창업자 셔먼은 IBM에 투자를 해서 큰 돈을 벌었다. 그 후  페어차일드는 카메라와 각종 전자제품을 만들어 내는 대기업이었다. 페어 차일드로 부터 150만달러의 투자를 받아낸 그들은 페어차일드 반도체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된다. 페어차일드 본사로부터 몇가지 참견은 있었지만 그래도 쇼클리 연구소에 있었던 8인의 주장이 대부분 받아들여졌고 실리콘소재를 이용한 트랜지스터를 개발해서 상업화하기도 한다. 이 제품은 윌리엄 쇼클리가 그토록 갈망했던 트랜지스터 상업화의 걸림돌이었던 여러 문제를 실리콘 소재를 사용해서 해결했는데 이는 8인의 멤버들이 이미 노벨상 수상자 윌리엄 쇼클리를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사건이었다. 

 

 

 

 


그후에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승승장구 하였으며 반도체와 관련된 세계최초의 기술들을 선보이며 미국에서 유명 과학자로 대접받게 된다. 그런데 회사가 성장하면 할수록 제품을 실제로 개발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페어차일드 본사사람들의 배만 불리게 해주었다. 8인의 멤버중에서 리더역할을 했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는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중요자리들이 본사사람들의 낙하산인사로 채워지자 불만이 쌓여갔다. 이미 8인의 배신자들중에 고든무어(Goden Moore)와 자신만 빼고 이미 여섯명의 동료는 페어차일드 본사의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고 모두 회사를 나간상태였다.  노이스는 끝까지 남으려 했지만 페어차일드 본사에서 내려보낸 사장과의 불화가 커지면서 결국 회사에 사표를 던진다. 이때 그의 단짝이었던 고든 무어에게 같이 사업을 하는게 어떠냐고 제안을 한다. 고든 무어는 로버트 노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하고 같이 회사를 그만둔다. 사실 둘은 실리콘을 이용한 첨단 제품을 만든다는 비전만 가지고 있었지 구체적인 사업 계획은 없었다. 


페어 차일드와 8인의 배신자들을 연결시켜주었던 금융가 아서록((Arthur Rock)이 주축이 되어서 투자자를 모집했다 하지만 이미 밥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반도체 업계의 슈퍼스타였다. 이 둘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다고 하자 전국에서 서로 투자를 하겠다고 달려들 정도였다. 그들은 구체적인 사업계획도 없는 상태에서 냅프킨에 적힌 몇가지 메모만으로도 단하루만에 250만달러나 되는 돈을 투자 받았다. 언론에서도 이들의 소식을 대서특필하며 앞으로 펼쳐질 회사에 큰 기대감을 표현했다.  처음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는 회사명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노이스-무어 일렉트로닉스(Noyce-Moore Electronics)로 정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잡음을 뜻하는 Noise와 많다를 뜻하는 More의 합성어로 헷갈려서 부정적인 이미지의 노이즈 무어즉 “잡음이 많다”를 떠올렸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새로운 회사이름을 찾아야 했다. 그들의 전문분야인 전자 집적회로를 표현하기 위해서 통합을 뜻하는 Integrate와 전자를 의미하는 Electronics 두 단어의 앞글자 들을 조합해서 인텔(INTEL)이라고 하였다. 로버트 노이스는 새로운 회사명이 지적인 느낌의 인텔리전트(Intelligent)를 떠올린다고 생각해서 특히 좋아했다. 그런데 이미 호텔 체인사업을 하는 다른 회사에서 인텔코(Intelco)라는 사명을 가지고 이었다. 회사이름에 애착을 느낀 노이스는 인텔코에게 1만 5천달러를 주고 회사이름을 구입했다.


1968년 창업한 인텔에 첫번째로 회사에 스카우트되어서 일을 시작한 사람은 앤디 그로브였다. 앤디 그로브는 이미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연구소에서 뛰어난 연구실적으로 최고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당시 8인의 반란자들은 사이가 좋았고 여전히 친밀하였다. 실제로 인텔의 초기 투자자에는 8인 반란자들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다. 원래 로버트 노이스는 8인의 배신자들과 함께 회사를 같이 차리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동료들은 앤디 그로브가 인텔에 합류할것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고 그의 출중한 실력이라면 로버트노이스와 고든무어 다음의 세번째 실권자가 될것임을 뜻하였다. 앤디 그로브의 부하직원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은 결국 로버트 로이스의 새로운 회사인 인텔에 합류할 수가 없었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 그리고 앤디 그로브는 완벽한 삼두체제를 이루며 인텔의 성장을 견인했다. 하나의 기판에 여러 개의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는 기술에 있어서는 로버트 노이스가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로버트 노이스는 이 기술을 바탕으로 해서 지금까지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려고 했다. 그 첫번째가 세계최초의 메모리칩 개발이었다. 로버트 노이스가 메모리 칩의 개념과 설계회로를 작성하는 역할을 했다면 앤디 그로브는 메모리칩을 실제로 제조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고든 무어는 제품개발에 문제가 있으면 해답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이론상에 시제품을 개발한다는 것과 대량생산을 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기술적인 괴리가 있었다. 1969년 첫번째 메모리를 개발했지만 실제 생산에 들어간 것은 1970년이었다.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의 일은 연구소의 몇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었지만 제조 분야를 맡은 앤디 그로브는 회사의 모든 직원들을 관할해야 했다. 공장의 모든 설비를 직접 셋팅해야 했고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뽑아서 교육시키고 관리해야 했다.  초기 메모리 양산율은 10%도 되지 않았다. 10개만들면 9개가 불량품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앤디 그로브는 50%정도의 성공율로 끌어 올렸다. 당시로써는 이 수치도 획기적이었다.


 또한 미세한 먼지가 반도체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몇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앤디그로브는 먼지에 대한 문제를 알게 된다. 그는 미세먼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방진복을 최초로 고안한다. 세계최초로 방진복을 도입한 만큼 이는  인텔의 상징이었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면 방진복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서 춤을 추는 것도 이 같은 이유이다. 

 

 

 


비록 그가 인텔의 창업자는 아니지만 오늘날의 인텔을 만든 사람이 누구냐고 한다면 당연 앤디 그로브이다. 로버트 노이스는 초기 메모리칩 개발에만 과연했을 뿐이지 그는 곧 회사의 사장으로 외부활동에 더 바쁘게 된다. 그리고 원래 여유와 낭만을 즐기는 로버트 노이스는 업무보다는 취미생활에 몰두했다. 어느덧 로버트 노이스는 인텔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되고 조금씩 실무에서 손을 떼게 된다. 75년도에 회장이 된 그는 거의 회사일에 관여하지 않았고 회사의 중대한 결정이 있을 때나 잠시 관여할 뿐이었다. 79년 까지 회장으로 재직했던 그는 복도에서 직원의 얼굴을 보고 이름이 생각나지 않자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한다. 고든 무어의 경우는 전형적인 학자타입으로 회사의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번 출근하면 연구소 밖을 거의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연구에만 몰두햇다. 직원들이 찾아와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해답을 제시하는것에 보람을 느꼈다. 일반직원이 며칠동안 밤을 새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고든무어에게 찾아가면 단 몇 시간만에 해답을 가르쳐줄 정도였는데 그는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즐겼다.   결국 경영이나 조직관리 그리고 예산과 회계문제에 있어서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앤디 그로브였다. 생산부서도 책임지는 앤디 그로브였기 때문에 공장설비와 가동에도 그가 관여했다. 물론 제품의 제품제조와 대량생산을 위한 연구에서도 앤디 그로브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인텔의 역사를 다루는 많은 책들은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에 대한 언급보다는 앤디 그로브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기 마련이다. 그만큼 앤디 그로브의 역할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인텔에 관한 책중에서 최고의 명저로 뽑히며 97년도 비즈니스 위크가 선정하는 올해의 경영서적에 뽑힌 인텔 인사이드의 저자 팀잭슨은  앤디 그로브야 말로 인텔 성공의 첫번째 공헌자라고 정의하였다. 


 97년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앤디 그로브를 선정하며 그를 디지털 시대의 계승자이자 선구자이며 디지털 혁명을 이끈 주인공이라고 극찬하였다. 미국이 첨단산업에서 누리는 성과들이야 말로 앤디 그로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할정도로 그는 단순히 인텔이 아니라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창조한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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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
IT2010.11.30 08:15
1. 스티브 잡스 (애플 CEO)



2004년 췌장암으로 수술을 받은 것은 너무나 유명하지요. 원래 췌장암이 3개월에서 6월정도밖에 살지 못할정도로 치명적인 병입니다. 그래서  처음 췌장암이 발견되자 의사도 스티브 잡스에게 주변을 정리하라고 충고를 할정도였죠.  나중에 정밀검진을 받았더니 다행히 치료가 가능한 희귀한 췌장암이라는 것이 밝혀졌고 이를 확인한 의사는 울었다고 합니다.  수술후 다시 회사에 복귀했지만 스티브 잡스의 병은 또다시 재발하면서 2009년에 다시 간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는 평생 면역 억제제를 맞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또한 생사를 오고가는 상황에서도 병실에서 아이패드개발을 점검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스티브 잡스는 빌게이츠처럼 은퇴해서 사회복지활동은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이요. 왜냐하면 스티브 잡스는 그야말로 일이 전부인 사람인듯합니다. 그에게 은퇴는 없지 않을까 싶어요. 스티브 잡스는 어차피 자식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을것이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지금 사회활동을 안한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는것은 섣부른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재산은 주식에 메여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가 빌게이츠처럼 은퇴해서 새로운 삶을 살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가짜 메일이 판치고 있어서 100% 진실인지는 확인할수는 없지만 미국언론에서 보도된 내용이니 이야기하겠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장기 이식을 촉진하는 그런 법안 캠페인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들은 한 독자가 스티브 잡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자신의 여자친구가 간과 관련된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매일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는 내용과 함께 스티브 잡스의 행동에 감사하다는 메일이었는데요.

메일을 받은 스티브 잡스가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답니다.

여자친구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인생은 덧없는 거랍니다.

Your most welcome, James. I’m sorry about your girlfriend. Life is fragile.


2. 캐롤 바츠(야후 CEO)




제리양 후임으로 야후의 CEO로 재임한 여성분입니다.  원래 이분은 컴퓨터 그래픽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사로 유명한 오토데스크의 CEO였는데요. 그런데 이분이 CEO가 되어서 회사를 출근한지 일주일만에 유방암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하고 의사가 절대적으로 만류했지만  단 4주만에 회사에 복귀합니다. 지금은 62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야후의 CEO로 활발하게 활동하는거 보면 확실히 암을 극복한것 같습니다. 많은 여성분들에게 훌륭한 역할 모델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3. 앤디 그로브(인텔의 전 CEO)




실리콘밸리의 현자죠.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중에 하나고 스티브 잡스나 구글의 창업자들이 수시로 조언을 듣는 분입니다. 1997년도에 올해의 CEO에도 뽑힌 분인데 1996년에 전립선암에 걸려서 세상을 깜짝 놀래킵니다.  그런데 이분이 원래 대학에서 강의를 하거나 책쓰기를 좋아하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전립선암에 걸리자 바로 최고의 치료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의사들과 수시로 상의했습니다. 그리고 전립선암을 완치한 그는 자신의 치료기를 포춘에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더 감동적인 이야기는 부인의 노력입니다.  앤디 그로브와 그의 부인은 실리콘밸리에서 모범이 되는 부부로 유명한데요.  앤디 그로브가 전립선암에 걸리자 그의 부인은 최고의 음식을 만들고자 수시로 스탠포드 대학교 도서실에 드나들면서 연구를 했고 두부와 같은 자연식 중심의 식이요법으로 앤디 그로브를 간호했다고 합니다.


4. 폴 알렌(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스티브 잡스에게 스티브 워즈니악이 있다면 빌 게이츠에게는 폴알렌이 있지요.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을 이끈 베이직과 도스개발을 주도했다고 합니다. 원래 빌 게이츠는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처럼 변호사가 되려고했지만 옆에서 폴알렌이 사업을 하자고 계속설득하였습니다. 원래 워싱턴 대학교를 다녔지만 빌게이츠와 자주만나려고 일부러 대학을 중퇴하고 허니웰에 취직할정도입니다. 폴 알렌이 세계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가 탄생했다는 잡지기사를 빌게이츠에게 들고 온것이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9년동안 마이크로소프트를 위해 헌신하였지만 유럽 출장중에 몸에 이상을 느끼고 검진을 받았더니 암의 일종인 호지킨 병에 걸린걸 알게 됩니다. 이때가 1983년으로 그의 나이 30밖에 되지 않은 어린나이였습니다.  아무래도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는 결국 병 치료를 위해서 회사를 쉬었고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를 퇴사하게 됩니다. 다행히 성공적인 치료를 이뤄내고 나중에는 참 다양한 일들을 합니다. 농구팀과 미식축구팀의 구단주가 되었고 거대한 요트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았죠.물론 자선활동에도 열심히하였고 틈틈히 각종 회사에 투자하면서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9년 암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치료가 가능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할수 있다고 합니다.


5. 손정의(소프트뱅크 창업자)




오랜 고생끝에 손정의가 사업에 가속도를 붙일 무렵이었던 1982년 손정의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심각한 만성 간염이로 인해서 5년밖에 살수 없다는 시한부인생을 선고 받게 됩니다. 손정의는 어쩔 수없이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의 나이 고작 28세였던 시기입니다. 손정의는 이때를 자신에게 가장 어려웠던 순간으로 꼽을 정도로 정말 힘들었던 사건입니다. 손정의는 오히려 일찍 죽는게 났지 5년 동안 죽을날을 기다려야 하는게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에 전념하던 어느날 그는 잊을 수 없는 새소식을 듣게 됩니다. 1983년 주간지에 만성간염이 치료가능하다는 기사가 실리는데 아버지가 이를 보고 손정의에게 전화를 한겁니다.  문제는 그 치료법이 학계에서는 인정받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손정의는 어차피 앉아서 죽느니 시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도박을 하게 되고 그의 증세는 기적적으로 완화됩니다. 그는 건강한 몸으로 소프트뱅크에 복귀하였고 지금도 현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중이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손정의의 사업이 그가 복귀한 이후 급성장을 이루고 있다는겁니다. 이는 그가 병실에서 읽은 책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원래 손정의는 책을 별로 읽지 않았는데 손정의는 투병생활중에 4천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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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
IT2009.07.08 15:00


 앤디 그로브가 인텔의 최고 경영자로 근무하면서 여러가지 실수를 경험한다. 그가 겪은 가장 큰 실수이자 위기는 펜티엄의 부동소수점 오류였다. 94년말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토마스 나이스리(Thomas Nicely)교수는 펜티엄의 부동소수점 연산에서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인터넷에 공개하자 컴퓨터 마니아들은 인텔에 전화를 걸어서 항의하기도 하였다. 인텔에서는 펜티엄의 오류를 조사했고 90억번을 연산할 때 한번 일어나는 사소한 결함으로 결론지었다. 펜티엄 컴퓨터를 이용하는 유저가 부동소수점 연산에서 오류를 직접 경험하게 될 확률은 2만 7천년간 컴퓨터를 사용해야 한번 일어나는 정도였다. 인텔의 이러한 설득에 유저들의 항의는 잠잠해졌다.

하지만 11월 22일 CNN이 펜티엄 오류소식을 특종형식으로 전세계에 보도를 하게 되자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또한 IBM에서 전격적으로 팬티엄칩을 장착한 컴퓨터를 리콜하고 당분간 판매를 정지한다고 하자 파장은 더욱 커졌다. PC라는 말 자체가 IBM에서 만들어낸 고유명사였다. 과거의 IBM이 아닐지라도 IBM의 영향력은 무시못했다. IBM의 펜티엄 판매중단 소식이 알려지자 인텔에는 수많은 항의전화가 걸려왔다. 인텔 인사이드라는 광고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치른 덕분에 브랜드의 인지도가 급상승하고 있는 중에 터진 사건이라 더욱 뼈아픈 순간이었다.

앤디 그로브는 이 사건을 사소한 결함으로 생각하고 너무 쉽게 봤다. 사람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면 자신들의 의견을 따르리라는 생각에 열심히 언론을 상대로 팬티엄칩의 오류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일반사람들이 팬티엄칩을 장착한 컴퓨터를 평생 사용해도 버그로 인해서 어떤 문제도 겪지 없을 것이라고 열심히 설득하였다. 단 수학자나 물리학자처럼 중요한 수학연산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교환해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앤디 그로브의 판단은 완전한 오판이었다. 사람들은 펜티엄의 버그가 얼마나 사소한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어찌되었던 오류가 있다는 사실에 불쾌했던 것이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처럼 유리창이 조금이라도 깨져있으면 아무리 큰 유리창이라도 갈아껴야 하듯이 사람들은 펜티엄이 조금의 결함도 없이 완벽해지기를 바랬다. 앤디 그로브는 그런 소비자들의 심리를 사건이 터진지 한달여가 지나서야 깨달았다. 11월22일 CNN의 보도로 시작된 펜티엄 버그 문제는 12월 19일 모든 팬티엄 칩을 교체해준다는 앤디 그로브의 선언으로 겨우 일단락되었다.  인텔은 이 사건으로 5억달러의 추가 비용이 들었고 오랜시간 소비자들을 속였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앤디 그로브는 이 사건을 인텔의 CEO로 재직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전세계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격 당하는 기분에 무척 괴로운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통해서 고객의 마음을 한번 더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이었고 소비자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체득할 수 있었다.

RISC와 CISC 싸움에서도 앤디 그로브는 큰 실수를 할뻔했다. RISC와 CISC는 컴퓨터 CPU를 만드는 방식의 차이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인텔은 CISC 기반으로 CPU를 만들었다. 그런데 1990년대로 들어서자 RISC 방식이 각광을 받는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도 RISC를 극찬찬하면서 미래의 CPU는 RISC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또한 IBM과 모토롤라 그리고 애플 3사는 공동으로 RISC기반의 PowerPC를 개발하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인텔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인텔도 CISC만을 고집하기에는 어려운 순간이었다. 그래서 앤디 그로브도 RISC의 유행에 동참하였다. 인텔에서도 RISC 를 적극지원하겠다는 발표까지 했다. 하지만 인텔 내부에서는 그의 생각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직원중에는 앤디 그로브에게 CISC와 RISC의  차이를 명확하게 밝히고 왜 CISC인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메일을 보내기도 하였다. 앤디 그로브는 직원들이 보내는 글들을 보고서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CISC와 RISC에 대한 공부를 새롭게 시작하였다. 그는 최대한 많은 자료와 데이터를 분석하고 비교하면서 결론을 찾으려고 했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그의 성향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앤디 그로브는 CISC와 RISC를 치밀하게 검토한 끝에 인텔의 주력은 CISC 방식이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하마터면 인텔이 자신들의 장점과 기득권을 잃을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직원들의 고언덕분에 더 큰 실수를 막을수 있었다. 앤디 그로브는 이러한 과정에서 또 한가지를 더욱 절실히 깨달았다. 직원들은 회사의 방향에 중요한 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항상 직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 메모리 산업에서  인텔이 잘나가고 있을 때도 아시아를 담당하는 직원한명이 일본 업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경고의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일본 업체들을 과소평가한 앤디 그로브는 그것이 신호라기보다는 잡음이라고 생각하고 무시를 했다. 나중에 메모리 산업에서 위기를 겪을 때 왜 그때 직원의 말을 듣지 않았는가에 대해서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래도 앤디 그로브는 결국 실수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새로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회사경영에는 역시 한순간도 안심해서는 안된다는 점이었다.

87년 앤디 그로브가 회사의 CEO가 될때만해도 인텔은 2 억 5천만달러의 매출로 세계 10위권의 반도체회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가 CEO를 맡은지 불과 5년만인 92년도에 세계 반도체 회사중에서 매출 1위를 기록한다. 그가 CEO를 그만둔 98년의 매출은 200억달러가 넘어섰으며 그는 불과 10년만에 회사를 10배나 성장 시켰다. 그는 회사의 생존을 위해 더욱 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항상 초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회사의 변화를 끊임없이 모색했다. 그의 이러한 편집광적인 성격과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인텔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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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