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세대의 바이블 같은<The Whole Earth Catalog>라는 출판물이 있었습니다. 이 서적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멜론파크에 살던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 시적인 느낌을 담아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와 데스크톱 출판이 이루어지기 전인 1960년대 후반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그 책은 모두 타자기, 가위, 폴라이드 카메라를 이용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구글이 등장하기 전이었던 35년 전, 종이책으로 된 구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깔끔하게 정돈된 도구와 기발한 개념들로 넘쳐난 이상적인 책이었지요.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Whole Earth Catalog>를 몇 회 발간한 후, 책의 역할이 끝나갈 즈음에 최종호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197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였을 때지요. 마지막 호의 뒤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여러분이 모험심이 강하다면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어 할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Stay Hungry(끝없이 갈망하라). Stay Foolish(한없이 바보처럼)” 이것이 바로 그들이 남겨준 작별의 메시지였습니다. “끝없이 갈망하라. 한없이 바보처럼” 저는 항상 그러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졸업을 하고 새로운 날들이 펼쳐질 여러분들에게 제가 꼭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Steve Jobs Stanford Commencement Speech 2005‎






2. 우리에게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일에 정말로 훌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인생은 짧고 결국에는 모두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삶으로 선택한 일입니다. 우리는 일본 어딘가의 절에 앉아서 수행을 하거나 항해를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골프를 치러갈 수도 있겠죠. 그들은 회사를 경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일을 하면서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니 좀더 가치가 있게 일을 매우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Steve Jobs speaks out, Fortune,  MARCH 07 2008





3. 이 산업과 함께 성장한 저는 매우 운이 좋았습니다. 사업 초창기에 저는 거의 모든 일을 담당했습니다.  제품출하, 영업, 부품구입 및 공급, 바닥 청소, 감자칩 구매 등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나는 내 양손으로 직접 컴퓨터를 나르기도 했습니다. 산업이 커져가는 동안에도 저는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The Seed of Apple's Innovation, BUSINESSWEEK, OCTOBER 12, 2004






4. 픽사의 모든 사람들은 매우 헌신적이었고 토이 스토리와 캐릭터를 사랑했습니다. 우리는 새로 만드는 영화를 너무나 좋아해서 죽을힘을 다해서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회복하는 데 1년이 걸릴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정말 너무나 힘든 일이었어요.

다큐멘터리 The Pixar Story, 2007년





5. 많은 사람들이 픽사는 하룻밤 사이에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하룻밤사이에 이루어진 성공도 오랫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Documentary Pixar Story  2007년





6. 리사를 만드는 사람들은 뭔가 훌륭한 것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맥을 만드는 사람들은 미치도록 훌륭한 제품을 원했다. 그것이 차이를 만들어냈습니다.


Apple confidential 2.0, Owen W. Linzmayer,No Starch Press, 2004





7.  사람들은 결과로 당신을 평가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결과물에 집중해야 합니다. 품질의 척도가 되세요. 어떤 사람들은 탁월함이 기대되는 환경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Steve Jobs: the journey is the reward,Jeffrey S. Young ,Scott, Foresman, 1988






8. 인터넷 창업 열풍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이 회사를 창업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끈기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몰론 이해는 합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절망스럽고 고통스런 순간이 너무나 많거든요. 사람을 해고해야 하고, 무엇인가를 취소해야 하는 것처럼 매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때 여러분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여러분의 가치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회사를 팔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지만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 속여야 합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경험이 될 수 있었던 것을 포기한 채로 말이죠. 절망과 고통의 순간 없이는 절대로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으며, 새롭게 쌓아올린 부를 지켜낼 방법도 알아낼 수 없습니다.

Apple’s One-Dollar-a-Year Man , Fortune ,24 January 2000





9. 우리는 이런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를 대중화시켰고, 최초의 아이맥에서는 플로피 디스크를 제거했습니다. 우리는 직렬과 병렬포트를 없애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아이맥에서 USB를 처음 보았을 겁니다. 우리는 맥북에어에서 옵티컬 드라이브를 최초로 버렸습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할 때 사람들은 우리가 미쳤다고 합니다.




<해설>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일에 열정을 쏟아 부어도 문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고 열심히 파고든다고 해도 주변에서 냉소적이면,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절대로 그런 시선에 흔들리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D8 - AllThingsD(via Engadget Steve Jobs live from D8)  1 Jun 2010 11. 




10. 


여기 미치광이들이 있다.

사회부적응자, 반항아, 말썽쟁이

네모난 구멍 속에 쑤셔 넣은 둥근 못같은 사람들 

세상을 다르게 보는 사람들

그들은 규칙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를 존중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들의 말을 인용하거나,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은 그들을 찬양하거나 비난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당신의 자유지만 단 한 가지, 당신은 그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류를 앞으로 이끌고 나간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미치광이로 보겠지만, 

우리들은 그들이 천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친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직접 참여한 Think Different의 광고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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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IT 삼국지2013.04.08 08:37

IT 삼국지(9) 초라한 시작이지만 자신만만했던 구글창업자들




빌 게이츠는 평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현재 경쟁자들보다도 자신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차고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만들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척 두려워했다. 이는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IT 기업이 사실은 차고처럼 작고 초라한 곳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이 IT 성공 신화를 설명하는 데 딱 들어맞는다. 빌 게이츠의 마이크로소프트 허름한 아파트에서 시작되었고, 스티브 잡스는 아버지 집의 차고에서 애플을 창업하였다. 그리고 세계 1위의 PC 제조업체인 HP가 차고에서 창업되었고, 2위의 PC 제조업체인 델 컴퓨터는 마이클 델의 기숙사에서 시작되었다.


구글의 성공 신화 역시 그들의 선배들처럼 차고에서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다. 처음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창업을 결심했을 때만 해도 돈이 없었다. 창업을 위한 여러 방법을 찾던 도중에 데이비드 체리턴(David Cheriton) 교수의 소개로 썬 마이크로시스템즈(Sun Microsystems)의 창업자인 앤디 베히톨스하임(Andy Bechtolsheim)을 만나게 된다. 구글의 시연을 직접 본 앤디 베히톨스하임은 구글 검색엔진의 우수성을 간파하였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것은 다른 인터넷 회사들이 광고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뛰어난 검색엔진만 가지고도 고객들의 입소문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창업자들의 자신감이었다. 또한 저가의 부품으로 직접 컴퓨터를 조립해 시스템을 구성하는 절약정신 또한 앤디 베히톨스하임이 투자를 결정하는 데 매력적인 요소였다. 앤디 베히톨스하임은 자리에서 아무런 협상도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10만 달러짜리 수표를 써 주었다. 앤디 베히톨스하임이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를 창업할 때 투자자들이 수표를 바로 써준 것이 너무나 고마웠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투자금을 받게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역사적인 순간을 축하하기 위해서 버거킹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하였다. 그다음 할 일은 정식으로 사무실을 구하는 것이었다. 마침 세르게이 브린은 데이트를 했던 여성을 통해서 대학 동문인 수잔 보이치키(Susan Wojcicki)를 소개받았다. 인텔에서 근무하던 수잔 보이치키와 데니스 트로퍼 부부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외곽에 60평 규모의 방 다섯 개짜리 집을 구입한 터라 구글을 위한 사무실 임대를 부탁할 수 있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임대 승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다음날 식료품을 한가득 구입해서는 일을 시작했다. 그들의 사무실은 차고와 연결된 방이었기 때문에 회사 주소의 정식 주소는 차고였다. 그들이 일하는 공간은 말이 사무실이었지 사실상 창고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 공간에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숙식을 해결하면서 매일 밤낮없이 일에 매진하였다. 구글의 첫 번째 정식 사원인 실버스타인 역시 새벽이 넘어서야 겨우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실버스타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퇴근이라도 할 수 있었던 반면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거의 24시간 내내 일을 했다고 한다.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으로 부상하다

구글의 두 창업자가 쉬지 않고 일에 매진한 덕분에 검색엔진은 나날이 향상되었다. 사용자들도 매달 50%씩 늘어났다. 그러나 정작 수익은 형편없었다. 그들의 검색엔진을 라이선스한 회사는 리눅스를 개발하고 판매하는 레드햇(RedHat)이었는데, 그로부터 받는 월 사용료 2,000달러가 고작이었다.


반면 구글의 접속자 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추가적인 네트워크 장비와 컴퓨터를 늘리기 위해 필요한 자금은 늘어만 갔다. 들어 오는 돈은 없는데 날이 갈수록 비용이 계속 늘어가자 앤디 베히톨스하임에게 투자받은 돈은 물론이고 둘의 신용카드와 가족으로부터 빌린 돈 90만 달러마저도 바닥을 드러냈다. 사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투자를 더 받아야 했다. 벤처캐피탈 업체들은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 종종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회사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투자를 받게 될 경우 회사의 통제권을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하지만 수익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회사의 통제권과 함께 최대 주주자리를 꼭 지키면서 투자를 받으려는 것은 꽤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생기듯이 마침내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도 행운이 굴러 들어왔다. 때는 1999년으로 닷컴붐이 최절정에 이르며 인터넷과 관련된 회사들이 가장 투자를 받기 쉬었던 때였다.


구글의 투자자 중 한 명이었던 론 콘웨이(Ron Conway)는 구글의 두 창업자에게 야후, 애플, 아타리에 투자해서 큰돈을 번 세쿼이아 캐피탈(Sequoia Capital)의 마이크 모리츠(Mike Moritz)를 소개 주었다. 마침 세쿼이아 캐피탈은 야후에 200만 달러를 투자한 터였다. 당시 야후는 인터넷 기업중에서 가장 잘 나가는 회사였고 덕분에 세쿼이아 캐피탈 역시 덩달아 큰돈을 벌었다. 그리고 시기적절하게 구글은 야후에 검색엔진을 제공하는 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마이클 모리츠는 구글의 뛰어난 검색엔진이 야후의 성공에 큰 도움이 될 것을 염두하고 야후와 구글이 긴밀히 협력할 수 있도록 투자를 결정했다. 이후 야후보다 훨씬 큰 수익을 내게 되는 구글에 대한 투자가 사실은 야후를 돕기 위한 투자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물론 이러한 아이러니는 구글의 입장에서 보면 큰 행운이기도 했다.


당시 구글에 투자하려는 회사는 세쿼이아 캐피탈만이 아니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와 넷스케이프 등에 투자를 해서 큰 수익을 낸 KPCB(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의 존 도어는 아마존의 창업자이자 구글의 초창기 투자자 중에 한 명인 제프 베조스를 통해서 구글을 소개받았고, 구글에 투자하기를 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KPCB와 세쿼이아 캐피탈이 일종의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두 회사는 확실한 주도권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에 공동투자가 아니라 자신의 회사로부터만 투자를 받도록 강요했다. 아무런 진전 없이 두 회사의 치열한 자존심 싸움으로 시간만 낭비하자 이에 신물이 난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투자를 받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투자를 받지 않겠다는 식으로 강하게 나가자 오히려 상황은 역전되었다. 세쿼이아 캐피탈과 KPCB이 절대 굽히지 않을 것 같던 자존심을 버리고 공동 투자를 받아들인 것이다.


두 회사는 각각 1,250만 달러씩을 공동으로 구글에 투자할뿐만 아니라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의 경영권을 보장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세쿼이아 캐피탈과 KPCB의 공동 투자는 단순히 2,500만 달러의 자금이 마련됐음을 뜻하지 않았다. 실리콘 밸리를 좌지우지 하는 캐피탈 업체로부터 동시에 투자를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구글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지를 세상에 알리는 가장 좋은 홍보 수단되었다. 실제로 각종 언론에서는 투자 소식을 앞다투어 보도하면서 구글을 극찬하는 기사를 계속해서 다뤘다. 덕분에 구글은 어느덧 실리콘 밸리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사가 되었다. 이렇게 그들은 성공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 소프트의 천하 삼분지계를 다룬 IT 삼국지 이야기는 다음에도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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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IT 삼국지2013.04.01 08:33


IT 삼국지(8) 비웃음을 이겨낸 구글 창업스토리




인터넷 웹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래리 페이지는 인터넷 웹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게 된다. 웹의 구조를 연구하던 그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불현듯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인터넷에 존재하는 모든 웹을 다운로드해서 각 웹페이지간의 연결 구조, 즉 링크를 분석해 보기로 결심한다. 래리 페이지가 작업에 들어가자 세르게이 브린 역시 깊은 관심을 보이고 기꺼이 동참했다. 래리 페이지는 인터넷 웹상에서 링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공간에서 링크가 많이 된 웹 페이지는 그만큼 가치가 있음을 뜻하였다. 


하나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른 사이트의 주소를 링크해 주는 것은 일종의 투표와 같았다. 워낙 학자 집안에서 자란 데다 박사 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인 터라 논문을 중요하게 여기던 래리 페이지에게 링크는 논문으로 치면 인용과 비슷했다. 훌륭한 논문일수록 다른 논문에서 참고문헌으로 인용될 확률이 높다. 래리 페이지는 인터넷상에서 링크된 횟수를 통해서 각 웹페이지간의 랭킹을 정하는 작업을 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웹페이지의 순위를 매길 때 한 가지 아이디어를 더했다.


 만약 논문이 권위 있는 학술지에서 언급되면 그만큼 더욱 가치 있는 논문일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단순히 링크의 횟수뿐만 아니라 링크를 건 웹사이트의 명성에 가중치를 더하였다. 이를테면 「뉴욕타임스」처럼 권위 있는 언론사의 사이트에서 링크를 한 웹페이지라면 일반 블로그에서 인용한 링크보다는 더 높은 순위에 올라갈 수 있는 공식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랭킹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사실 이 작업은 래리 페이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렵고 무모한 일이었지만 세르게이 브린의 천재적 수학 실력 덕분에 어려운 난제들을 차근차근 풀어갈 수 있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래리 페이지는 웹페이지의 순위를 정하는 알고리즘을 검색에 접목해 보고자 하였다. 검색어를 입력하면 검색어와 관련한 웹페이지의 순위를 나열해 주는 검색엔진을 완성하자 검색어와는 관련성도 떨어지고 중요하지 않은 웹페이지를 잔뜩 보여주는 기존의 검색엔진보다 훨씬 뛰어난 검색 결과를 보여주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자신들의 검색엔진을 백럽이라고 불렀으나 나중에 구글로 바꾸었다. 구글은 원래 해안가의 모래 숫자나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의 숫자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수를 뜻하는 구골(Googol)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연구실 동료였던 숀 앤더슨(Sean Anderson)이 회사 이름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던 중 스펠링을 ‘Google’로 잘못 적으면서 구글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글 검색엔진이 서비스를 시작한 곳은 스탠퍼드 대학교의 서버였다. 그래서 구글의 첫 번째 인터넷 주소는 ‘google.stanford.edu’였다. 구글은 기존의 검색엔진보다 탁월했기 때문에 스탠퍼드 대학교 내에서 인기가 좋았다. 점차 늘어나는 사용자들의 검색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컴퓨터가 더 필요했다. 그러나 학생 신분이었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도교수의 도움을 받아 학교자금에서 1만 달러를 지원받았지만 구글을 제대로 서비스하기에는 컴퓨터가 부족했다. 결국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컴퓨터 부품을 찾아 다녔다. 그들은 잡동사니 부품들을 모아서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이때 효율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하는 노하우를 쌓게 된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을 서비스하기 위해서는 대형 서버 컴퓨터가 필요했다. 하지만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저가의 개인용 컴퓨터를 병렬적으로 연결해서 서버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비록 돈이 부족해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었지만, 최소의 비용으로 컴퓨터를 만들고 이를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오늘날 구글 성공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주변의 컴퓨터 부품을 최대한 활용해서 컴퓨터를 구축해도 항상 장비가 부족했던 둘은 스탠퍼드 대학교에 새로 컴퓨터가 배달될 때 이를 몰래 가져다 쓰는 대담한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컴퓨터 장비들은 래리 페이지의 기숙사 방에 설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은 컴퓨터로 가득 찼다. 그래서 검색엔진을 다듬는 실제 작업은 세르게이 브린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인터넷 웹페이지를 방문해서 데이터를 모아오는 작업은 네트워크에도 부담이 되는 문제였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인터넷에서 데이터를 긁어 올 때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네트워크는 종종 과부하에 걸렸고 스탠퍼드 대학교 전체 인터넷망이 다운되는 적도 있었다. 다행히 벤처기업의 요람인 스탠퍼드 대학교답게 초창기에는 이를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다. 


관성의 법칙을 비웃고 스스로 돌파하다


구글 서비스가 나날이 인기를 끌게 되자 래리 페이지는 이를 사업으로 발전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박사 과정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 포털 업체에 구글을 백만 달러에 팔 생각이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당시 검색 점유율 50%가 넘었던 알타비스타를 시작으로 야후, 익사이트, 인포시크 등 당시 내로라하는 각종 포털 업체들을 찾아가서 구글을 시연해 보였다. 하지만 당장 꺼지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계속해서 기업들에게 거절을 당하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좌절감을 느꼈다. 너무 화가 났지만 포기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둘은 결국 학교를 떠나서 직접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현재 승승장구하는 구글의 창업이 사실은 아무도 그들의 검색엔진을 구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면 시대를 앞선 선구자들의 비애가 느껴진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검색엔진이 인터넷 시대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봤지만, 정작 포털 업체들은 검색이란 수많은 인터넷 서비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구색을 맞추는 차원에서 검색 서비스를 제공할 뿐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구글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의 고정관념으로 현실을 보는 사람은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려는 사람들은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사람에게 인정 받기가 힘들다. 70년대 중반 스티브 잡스가 개인용 컴퓨터가 모든 가정과 학교에 보급될 것이라면서 애플2 컴퓨터로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를 미치광이 취급하였듯이 말이다. 그런데 IT라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된 인물들은 한결같이 구글의 창업자들이나 스티브 잡스처럼 비웃음과 조롱을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빌 게이츠가 처음 소프트웨어만 판매하겠다고 나섰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70년대만 해도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를 사면 당연히 따라오는 보너스 정도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적재산권이 명확하지 않았고, 소프트웨어 복제 또한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빌 게이츠가 개발한 베이식 역시 복제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에 분노한 빌 게이츠는 불법 복제는 절도 행위라면서 이를 자제할 것을 촉구하는 공개 편지를 작성한다. 그러나 이를 읽은 독자들은 오히려 빌 게이츠를 비난하였다. 그의 비전은 분명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생각이었지만 지적재산권이 희박하던 당시에 소프트웨어만으로 수익을 내겠다는 그의 발상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었다. 


모든 물체에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뉴턴의 제1법칙, 즉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인간 역시 관성의 법칙처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동물이다. 그래서 보수적인 동물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강력한 외부의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선지자들은 외부의 자극 없이 스스로 변했으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그만큼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다. 사실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이지만, 창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각종 암초를 만나기 마련이다. 결국 성공의 이름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IT 시대 승자들은 그들이 부딪힌 암초들을 강력한 자기 확신과 의지로 이겨 낸 사람이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 소프트의 천하 삼분지계를 다룬 IT 삼국지 이야기는 다음에도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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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스토리2012.10.22 13:53

 




마크 주커버그는 1984년 뉴욕 답스 페리(Dobbs Ferry)에서 치과의사인 아버지 에드워즈와 심리박사인 어머니 카렌사이에서 1남 3년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다재 다능한 아이였다. 학창시절 수학, 물리분야에서 상을 받았으며 프랑스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어등을 쓰고 읽을 수 있다. 펜싱팀의 주장으로 MPV까지 수상했던 그가 가장 좋아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 했던 것은 컴퓨터였다.  12살 때 윈도우 3.1이 설치된 486 DX 컴퓨터로 가족을 위한 네트워크 서비스를 구축하기도 했다. 중학생 시절에는 모노폴리나 로마제국을 주제로 한 컴퓨터 게임을 제작하며 그의 프로그래밍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고등학교시절에는 학교 친구와 함께 사용자에게 음악을 추천해주는 프로그램인 시냅스(Synapse)를 만들었는데 AOL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기업들이 백만달러에 구입하겠다는 제안을 받을 정도였다.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컴퓨터 그중에서도 인터넷 에 대한 열정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대학친구들에게도 자주 인터넷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나중에는 컴퓨터에 관심 없던 친구도 컴퓨터와 인터넷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평소 장난끼가 많았던 그는 페이스 매쉬라는 프로그램을 만든다. 이 프로그램은 일종의 이상형 월드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두명의 남자나 여자사진을 보여주고서 누가 더 마음에 드는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캠퍼스에서 누가 최고 얼짱인지를 투표하는 이 프로그램 만들기 위해서 마크 주커버그는 직접 기숙사의 서버를 해킹하기 까지 하였다.  마크 주커버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만든 사이트를 적극적으로 알렸는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입소문이 돌면서 450명이 접속을 하였다. 하버드 대학교에서는 주커버그의 프로그램을 발견하자 즉시 접속을 막고 마크주커버그와 함께 프로그램 개발을 도와준 친구들을 징계 위원회에 회부했는데 이 사건으로 마크 주커버거는 근신처분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을 장난으로만 소진하지 않았다. 기말고사를 보기전에 직접 웹사이트를 만들어서 친구들이 그림에 대한 평을 쓰도록 유도하였는데 그는 친구들의 글들을 읽고 기말고사에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마크 주커버그는 자신의 컴퓨터 실력으로 자잘한 일들을 도와주면서 짭짤한 수익을 얻기도 하였다.


2004년 마크 주커버그는 자신이 가입한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였던 프렌드스터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직접 서비스를 만들 생각으로 TheFacebook.com 주소로 도메인을 등록한다. 마크 주커버그는 하버드 학생들이 직접 사진과 프로필을 올리고 이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서비스를 구상한다.  온라인을 통해서 친구들과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전하는 이 서비스는 오직 하버드 대학생들만 이용가능하도록 한다는 차별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마크 주커버그는 여러가지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하버드대생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은 가입자들에게 묘한 우월감을 주었고 실질적으로 학교내에서 이성친구를 사귀거나 인간관계를 확장시킬 수 있는 도구였다.  여기에 주변친구들과 하버드 대학교내의 학교신문을 통해서 홍보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던 서비스로 시작했다면 당시 학생이었던 그는 서버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더 페이스북의 런칭은 성공적이었다. 오픈을 한지 3주만에 가입자수가 6천명이 넘어섰고 다른 학교 학생으로부터 자신들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가 밀려 오기 시작했다. 마크 주커버그 역시 원대한 꿈이 있었던 만큼 하버드 대학에서만 자신의 서비스를 이용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도 하루에 하나씩 더페이스북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대학교의 수를 추가하여 갔다. 2004년 2월에 서비스를 시작한 더 페이스북은 5월에 10만명의 가입자수를 받았다. 이러한 폭발적인 성장덕분에  페이스북에 투자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천만달러에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제안도 받을 정도였다. 


 

여름방학이 되자 마크 주커버그는 그의 인생을 결정할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페이스북을 만든 친구들과 캘리포니아 팔로알토에서 함께 지내기로 한것이다. 애플과 구글 같은 세계최고의 IT 기업들이 자리한 실리콘 밸리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팔로 알토의 방 네개짜리 집을 구한 마크 주커버그는 음악 서비스인 냅스터를 만들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숀 파커를 찾아간다. 냅스터를 그만 둔 숀 파커는 수십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한 인터넷 서비스를 만들었지만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에 화가난 투자자들이 그를 회사에서 쫓아냈다.  소셜네트워크 서비스의 가치를 꿰뚫어 보고 있던 숀 파커는 더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주커버그에게 사업에 대해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서 이메일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마크 주커버그와 숀 파커가 인연이 되어서 팔로알토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고 함께 의기투합하게 된다. 마크 주커버그와 다른 친구들은 사업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지만 숀 파커는 이미 실리콘 밸리에서는 유명인사였다. 마크 주커버그가 특히 주목한 것은 숀 파커가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투자자에서 쫓겨났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실패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마크 주커버그는 숀 파커를 사장으로 영입한다.


 숀 파커의 역할은 대학의 동아리 수준이었던 더 페이스북을 제대로 된 기업으로 탈바꿈 시키는 것이었다. 숀 파커와 마크 주커버그는 팔로알토의 집에서 함께 합숙을 하면서 사업을 더 확장시켰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더 페이스북의 회원은 20만명을 넘어섰는데 마크 주커버그는 부모님의 도움을 얻어서 서버와 같은 각종 비용으로 8만 5천달러나 쓰게 된다. 사업의 성공을 확신한 마크 주커버그는 방학이 끝나도 하버드대학교에 돌아가지 않고 팔로알토에남아서 더 페이스북에 전념하기로 결정한다.


사장으로 합류한 숀 파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실리콘 밸리에서 쌓은 폭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투자자를 찾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페이스북은 늘어나는 사업자로 인해서 갈수록 불어나는 운영비를 충당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숀 파커는 당시 꽤 잘나가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링크드인의 창업자이면서 투자자로 활약했던 리드 호프만을 찾아간다.  그러나 호프만은 더 페이스북이 링크드인과 경쟁관계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투자 대신 전문 투자자인 피터 티엘을 소개해준다. 피터 티엘은 숀 파커와 마크 주거 버그를 만난 후 더 페이스북의 가치를 490만달러로 계산하고 50만달러를 대여형식으로 투자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늘어나는 회원수 때문에 피터 티엘의 자금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다시 숀파커가 나서서 WTI로부터 30만달러를 대출받는다. WTI는 숀 파커를 통해서 더 페이스북의 진가를 알게 되고 회사에 투자를 하게 된다. 페이스북의 창업자들이 숀 파커를 특히 좋아했던 것은 투자를 받는데 엄격한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업자들이 투자자들에게 좌지우지 될 수 있는 상황을 애초에 피하고 철저히 자신들이 회사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투자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2005년 2월이 되자 더 페이스북의 가입자수는 200백만명을 넘어섰고 투자자들도 더 페이스북에 투자하기 위해서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페이스북의 가치를 6000만달러로 인정하고 지분의 10%를 600만달러에 구입하겠다고 제안한다. 비아컴에서는 더 페이스북을 7500만달러에 매입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하였다. 여기에 엑셀파트너스가 더 페이스북의 존재를 알고 접근을 한다. 엑셀 파트너스는 케빈 에프루시는 리드 호프만을 통해서 더 페이스북의 관계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고 리드 호프만은 숀파커를 소개해준다. 페이스북의 가능성을 높이산 액셀 파트너스는 워싱턴포스트와 투자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몸이 달았다.


 액셀 파트너서는 워싱턴 포스트보다 더 좋은 조건에 천 만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히게 된다.  마크 주커버그는 하버드 대학교 선배이기도 한 워싱턴포스트의 CEO인 돈 그레이엄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워싱턴 포스트의 투자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엑셀 파트너스가 페이스북의 가치를 9천 8백만달러로 인정하고 1천 2백 7()십만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하자 결국 마크 주커버그는 엑셀 파트너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이 투자를 통해서 마크 주커버그는 백만장자가 되었고 그동안 그를 괴롭혔던 자금 문제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었다. 더 페이스북은 투자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가운데서도 승승장구 하였다. 2006년 12월 100만이었던 회원은 6월이 되자 300만명을 넘어설정도로 폭발적인 증가를 보였다. 안정된 자금덕분에 실리콘 밸리의 인재들도 속속 영입 할 수 있었다. 더 페이스북의 가장 큰 문제는 이용자수가 증가함에 따라서 발생하는 과부하였다. 인기있었던 인터넷 서비스들이 불안한 서버문제로 인해서 무너졌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더페이스북은 더욱 각별히 신경을 써서 서버관련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회사이름도 숀 파커의 제안에 따라서 더페이스북에서 정관사인 더를 빼고 페이스북으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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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