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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4.04 토마스 왓슨의 IBM 창업스토리와 위기의 도래 (2)



IBM의 시초는 1911년 설립된 CTR(Computing Tabulating Recording Corporation)이며 1924년 현재의 회사명으로 바꾸었다. 1888년 미국정부에서는 대규모 통계조사를 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공모하였다. 과거의 방식으로 통계를 내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돈과 인력 그리고 시간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역무원이었던 홀러리스의 아이디어가 당선된다. 특수종이에 구멍을 뚫는 방식의 천공카드 시스템을 고안하여 통계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낸다. 이를 계기로 그는 타뷸레이팅 머신(Tabulating Machine)이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된다.


1911년 타뷸레이팅 머신은 저울업체인 컴퓨팅 스케일 코퍼레이션 (Computing Scale Corporation)과 저장 장치 전문회사인 ITR(the International Time Recording Company) 합병하여 IBM의 전신인 CTR로 재탄생한다.  


1914년 오늘날도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중의 하나로 뽑히는 토마스 왓슨이 회사의 사장으로 선임되며 회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토마스 왓슨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회사의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외향적인 성격의 그는 따분하게 책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외부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각종 피아노 같은 악기를 판매하는 영업사원이 된다. 수중에 장사를 할 돈이 만들어지자 그는 정육점을 차린다. 하지만 친구에게 빌려준 거액의 돈을 떼이고 설상가상으로 가게마저 망하자 어려움에 처한다. 그는 다시 자신의 적성을 살려서 사무기기 업체인 NCR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한다. 


NCR에서 그의 재능은 완전히 폭발하게 된다.  놀라운 영업실적을 기록하면서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왓슨이 하나의 지점을 맡으면 그 지역 주변은 NCR의 제품이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가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경쟁 업체들의 입지는 축소되었다. 급기야 라이벌 업체들은 왓슨을 상대로 반독점 금지법을 어겼다면서 소송을 건다. 왓슨은 상대회사의 영업점 근처에 지점을 내거나 영업사원을 스카우트하였는데 지금으로 보면 아무일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법에서 금지하는 사항이었다.  결국 왓슨은 5천달러의 벌금과 함께 1년의 징역형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왓슨이 다니는 회사 NCR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충성을 다 받친 NCR이 자신을 내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토마스 왓슨이 총책임자로 취임했던 1914년만 하더라도 CTR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Think라는 슬로건을 통해서 직원들에게 생각을 강조하였고 이는 회사 제품의 기술혁신을 이루어냈다.  특히 해외시장 개척이 큰 성공을 거두어서 1914년 400만달러의 매출은 1920년 1400만달러로 네배나 껑충 뛰었고 흑자로 반전했다. 그는 세계공황으로 경제가 나락에 빠질때도 직원을 한명도 해고하지 않으며 직원간의 단결을 도모하였고 이는 IBM의 평생고용신화로 이어졌다.   왓슨은 직원들에게 짙은 양복에 하얀셔츠 그리고 넥타이를 꼭 메도록 했는데 이는 고객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이는 고객만족 경영으로 이루어져서 CTR의 성공을 이루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회장에 취힘한 1924년에 그는 해외시장에서의 인지도 상승을 위해서 사명을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으로 바꾸며 회사의 성장을 견인한다. IBM이 컴퓨터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건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에이켄이 마크1이라는 컴퓨터를 개발할 때 제작비용과 장비를 제공하면서부터다.  하지만 마크 1의 발표회장에서 당시 왓슨사장은 자신의 좌석이 뒷자리에 있는 것에 격분한다. 당시 언론에서도 IBM의 역할은 별로 언급이 없고 오직 하버드 대학교의 에이켄 교수만을 칭송할 뿐이었다. 자신의 푸대접을 견딜수 없었던 그는 마크 1보다 훨씬 뛰어난 컴퓨터를 자체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왓슨 연구소를 1945년에 세운다. 그리고 드디어 IBM의 첫번째 컴퓨터 SSEC( Selective Sequence Electronic Calculator)를 개발한다.  하지만 SSEC는 상업적인 시도라기 보다는 만들었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왓슨 조차도 SSEC의 거대한 크기에 짜증을 부릴정도였다. 마침내 1952년 드디어 IBM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IBM 701을 개발하고 판매에 돌입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토마스 왓슨은 컴퓨터의 시대를 맞이하여서 이제는 회사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955년부터는 토마스 왓슨의 아들인 톰 왓슨 주니어가 사장이되어서 경영을 승계한다. 토마스 왓슨은 회사의 미래가 타자기나 천공카드 시스템 같은 사무기기에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의 아들 톰 왓슨은 회사의 미래는 컴퓨터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둘은 부자관계이지만 자주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을 하게 된 순간 경영을 넘겨주었다. 톰 왓슨은 컴퓨터 관련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연 수입의 3분의 1을 컴퓨터 개발과 연구에 쏟아 부을 정도였다. 드디어 그는 원자폭탄 개발비용보다 두배가 넘는 50억불을 들여서 최초의 메인 프레임 컴퓨터로 일컬어지는 SYSTEM/360의 개발을 1964년에 완료한다. 


50억불짜리 도박은 완벽하게 성공해서 SYSTEM/360은 정부, 연구소, 기업등 컴퓨터가 필요한 모든 곳에서 사용되어 IBM이 컴퓨터 시장을 독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SYSTEM/360의 개발이후 IBM은 매년 30% 이상의 성장을 거듭하면서 1972년는 시가총액469억달러로 미국에서 가장 비싼 회사가 된다. IBM은 1985년 500억달러의 매출에66 억달러의 이익을 내며 세계 기업중에서 최고의 수익을 거두는 회사로 등극한다.  또한 IBM은 1983년부터 1986년 까지 경제전문지 포춘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되면서 역사상 최고의 기업으로 인정받는다.  1987년에는 주식의 가치가 최고가인 176달러까지 상승하여 시가총액 787억달러를 기록하면서  역시 세계 1위의 기업으로 올라서는 전성기를 누린다. IBM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컴퓨터가 너무 잘 팔려서 이다. 컴퓨터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자 미국정부에서는 IBM에 반독점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은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이어졌으며 친기업성향의 레이건 정부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무죄로 결론난다.  하지만 장시간 이어진 반독점 소송으로 IBM에는  관료주의와 보신주의가 회사내에 뿌리박힌다.  경쟁업체를 조사하거나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어떠한 전략도 반독점 소송에서 불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회사를 험담하는 메모하나라도 반독점 소송에 영향을 줄수 있는 관계로 IBM 내부에서는 경쟁회사에 대한 어떠한 코멘트도 금지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와 소송중인 상황에서 경쟁업체에 대한 분석도 하지않고 그렇다고 고객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아닌데 IBM의 제품은 끊임없이 날개 돋힌듯 팔렸다. IBM은 불황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상최고의 이익금을 경신했다. 


이렇게 되자 어느덧 IBM내부의 작원들 사이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한다는 자만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세상의 법보다 IBM WAY 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IBM 직원들의 자신감은 오만으로 가득차게 된다.  사실 IBM의 추락은 1990년에 들어서며 갑작스럽게 극적으로 일어났지만 회사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90년 690억 매출에 60억달러의 이익을 얻었던 IBM은 91년에는 640억달러의 매출에 28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또한 92년에는 645억달러의 매출에 50억 6천만달러의 적자로 미국 기업 역사상 최고 적자금액을 경신하면서 IBM에 대한 위기론이 급부상한다.  92년 연말이 되면서 세계의 언론은 IBM의 몰락을 주목하였다. 


연일 IBM을 화제로 해서 각종 이야기꺼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IBM의 화려했던 과거성적을 생각해보면 2년간의 연속적자는 회사로써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슬럼프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IBM의 적자가 구조적인 문제에서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IBM은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만들고 사실상 독점을 했던 회사였다. IBM 컴퓨터를 대체할 컴퓨터가 세상에 존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IBM으로부터 컴퓨터를 구입한사람들은 제품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을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IBM이 그냥 철수해버리겠다고 말하면 회사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어야 했다. 손님은 왕이고 항상 고객이란 대접 받기 마련인데 IBM에게는 그럴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쓰는 대형 컴퓨터 즉 메인 프레임 시장에서 IBM은 유일한 공급자이자 절대자였고 고객은 IBM 컴퓨터를 하루라도 빨리 회사에 설치하기 위해서 IBM 직원을 상대로 로비를 펼쳐야 할정도였다. 





하지만 어느덧 히타치와 같은 일본전자 업체들을 선두로해서 IBM이 장악한 메인 프레임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더 이상 IBM은 유일한 메인 프레임급의 컴퓨터를 공급할 수 있는 사업자가 아니었다. 일본업체의 약진은 IBM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또 한편으로는 데스크탑 컴퓨터의 약진도 눈에 띄었다. IBM은 소형컴퓨터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데스크탑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IBM이 장악했던 중대형컴퓨터 시장을 대체하여 갔다. 이는 뉴욕을 기반으로 한 IBM이라는 골리앗과 캘리포니아지역의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들이 연합을 한 다윗간의 거대한 주도권싸움이었다. IBM은 거대했지만 공룡처럼 굼떴고 판단이 느렸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들은 IBM보다 영리했고 민첩했다. IBM이라는 거대조직에서는 의사 결정이 체질적으로 실리콘 밸리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은 어느덧 IBM의 각종 사업부를 따라잡고 있었다. 이미 말했듯이 IBM은 컴퓨터 하드웨어와 부품들 그리고 운영체체에서부터 각종 응용소프트웨어 모두를 개발했고 그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 원래 IBM은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독점적으로 사용했는데 유닉스와 같은 개방형 소프트웨어가 등극하면서 그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중대형컴퓨터에서 유닉스를 탑재한 썬마이크로 시스템즈와 휴렛패커드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또한 썬마이크로 시스템즈와 휴렛팩커드는 워크 스테이션의 성능을 향상시켜서 IBM의 독무대였던 메인 프로임 시장에도 진출하면서 점유율을 향상시켰다. 컴퓨터의 저장장치 역시 IBM이 최초로 개발하였고 시장의 왕자였다. 하지만 대형 저장장치 시장에서는 EMC가 소형장치에서는 시게이트가 IBM을 따라잡았다. 네트워크의 개념 역시 미국 국방성의 지원을 받은 IBM이 만들어 놓았고 이에 대해서는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소프트웨어적인 표준 규격에서 TCP/IP에 뒤쳐졌고 하드웨어 장치에서는 시스코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대형컴퓨터를 위한 데이터 베이스 프로그램도 오라클에게 밀렸고 소형 컴퓨터를 위한 데이터 베이스도 로터스에게 시장을 내주었다.  PC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소형컴퓨터 시장에 진출했던 IBM-PC사업부 마저도  델과 컴팩의 협공에 위태롭기 그지없었으며 적자행진을 거듭했다.


IBM은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제품을 최상급으로 개발해내는 업계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이런 절대적인 위상을 바탕으로 수익을 창출했던 IBM이 모든 컴퓨터 관련 제품의 품질이 2류로 전락하면서 적자 행진이 시작됐기에 IBM의 추락은 막을 수 없을 듯이 보였다.  모든 언론과 유명인사들은 IBM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봤다.  애플의 컴퓨터 광고를 담당했던 스티브 헤이든(Steve Hayden)은 IBM이 총체적인 부실상태라고 진단했으며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앨리슨은 IBM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하였다. 특히 컴퓨터 저널리스트로 유명한 찰스 퍼거슨(Charles H. Ferguson) 과 찰스 모리스( Charles R. Morris)가 쓴 컴퓨터 전쟁(Computer Wars)에서 IBM의 몰락은 한때 세계를 풍미했던 소련의 붕괴와 비슷하다고 하여서 많은 사람들의 반향을 일으켰다. 

IBM에게 있어서 더 문제였던 것은 외부에서 회사의 몰락을 점치고 이렇게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보다 못한 IBM 이사회의 짐 버크(Jim Burke)가 회장겸 CEO인 존 에이커스를 사임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짐버크는 미국의 대표적인 의약품회사인 존슨앤 존슨의 (Johnson & Johnson)의 CEO로 ibm의 사외이사로 활동중이었다. 1982년 정신병을 앓던 사람이 진통제인 타이래놀에 독극물을 넣어서 여덟명의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존슨앤 존슨은 큰 위기를 겪게 된다. 이때 짐버크는 미국에 있는 모든 타이래놀 제품을 회수하고 새로운 포장용기를 개발할때까지 시장에 제품을 팔지 않았다. 기존의 캡슐형태는 누군가 뜯어본 흔적이 남지 않지만 알약형태로 포장을 바꿈으로 누군가 포장을 열어보면 흔적이 바로 나타나게 하였다.  


타이래놀은 1억달러의 손해를 봤지만 사람들은 짐버크회장의 용기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내었다.  타이래놀 사건으로 인해서 침몰직전 까지 갔던 존슨앤 존슨은 짐버크 회장의 뛰어난 윤리경역덕분에 예전보다 사람들의 더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비록 짐버크는 외부에서 초빙된 이사회멤버였지만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였던 만큼 그의 명성과 영향력이라면 존 에이커스를 사임시킬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1992년 12월 짐버크는 그의 명성을 발휘하여 몇몇 이사회 멤버들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3년 1월 마침내 존 에이커스를 탄핵시키고 새로운 CEO를 임명하기 위한 인사위원회를 구성한다.




IBM의 차기 CEO로 가장 먼저 언급된 사람은 적자 투성이의 GE를 살려낸 경영의 천재 잭웰치였다. 잭웰치는 부임하자 GE의 CEO로 임명되자 마자 강력한 구조조정을 시행하였다. 그는 10만명이 넘는 인력을 정리해고 하였는데 자고 일어나면 회사의 건물은 그대로 인데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해서 중성자탄 잭이라는 별명까지 생길정도였다. 당시 인사위원회 사람들은 잭웰치가 시행했던 강력한 구조조정이 IBM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를 어떻해서든지 스카우트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잭웰치가 자신의 왕국인 GE를 떠날마음이 있을리가 없었다. IBM은 그래도 여전히 최고의 CEO를 영입하기 위해서 매우 이례적으로 미국의 양대 헤드헌팅 업체인 하이드릭 앤 스터러글(Heidrick and Struggle) 스페선 스튜어트(spencer struart)모두에 일을 주기까지 하였다.


IBM은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경쟁상대중의 하나였던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에게도 CEO를 제의했지만 퇴짜를 맞았고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맞수였던 애플의 존스컬리(John sculley)에게도 역시 거절당했다. 그 밖에 얼라이드 시그널의 CEO 래리보시디(Larry Bossydy) 모토로롤라(Mortorola) CEO 조지피셔 역시 IBM의 제안을 받았지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IBM으로부터 CEO를 제안 받지 못한 미국의 경영자는 없을 것이라는 농담까지 하였다. 하지만 IBM의 암담한 미래 때문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루거스너가 IBM에 전격적으로 회장겸 CEO로 지명되면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IBM을 부활시킨 루거스너 이야기는 다음에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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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