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의 시초는 1911년 설립된 CTR(Computing Tabulating Recording Corporation)이며 1924년 현재의 회사명으로 바꾸었다. 1888년 미국정부에서는 대규모 통계조사를 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공모하였다. 과거의 방식으로 통계를 내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돈과 인력 그리고 시간이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역무원이었던 홀러리스의 아이디어가 당선된다. 특수종이에 구멍을 뚫는 방식의 천공카드 시스템을 고안하여 통계분야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어낸다. 이를 계기로 그는 타뷸레이팅 머신(Tabulating Machine)이라는 회사를 창업하게 된다.


1911년 타뷸레이팅 머신은 저울업체인 컴퓨팅 스케일 코퍼레이션 (Computing Scale Corporation)과 저장 장치 전문회사인 ITR(the International Time Recording Company) 합병하여 IBM의 전신인 CTR로 재탄생한다.  


1914년 오늘날도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중의 하나로 뽑히는 토마스 왓슨이 회사의 사장으로 선임되며 회사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토마스 왓슨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회사의 경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외향적인 성격의 그는 따분하게 책상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외부에서 활동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각종 피아노 같은 악기를 판매하는 영업사원이 된다. 수중에 장사를 할 돈이 만들어지자 그는 정육점을 차린다. 하지만 친구에게 빌려준 거액의 돈을 떼이고 설상가상으로 가게마저 망하자 어려움에 처한다. 그는 다시 자신의 적성을 살려서 사무기기 업체인 NCR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한다. 


NCR에서 그의 재능은 완전히 폭발하게 된다.  놀라운 영업실적을 기록하면서 승진을 거듭하게 된다. 왓슨이 하나의 지점을 맡으면 그 지역 주변은 NCR의 제품이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가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경쟁 업체들의 입지는 축소되었다. 급기야 라이벌 업체들은 왓슨을 상대로 반독점 금지법을 어겼다면서 소송을 건다. 왓슨은 상대회사의 영업점 근처에 지점을 내거나 영업사원을 스카우트하였는데 지금으로 보면 아무일도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법에서 금지하는 사항이었다.  결국 왓슨은 5천달러의 벌금과 함께 1년의 징역형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왓슨이 다니는 회사 NCR과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충성을 다 받친 NCR이 자신을 내쳤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토마스 왓슨이 총책임자로 취임했던 1914년만 하더라도 CTR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는 Think라는 슬로건을 통해서 직원들에게 생각을 강조하였고 이는 회사 제품의 기술혁신을 이루어냈다.  특히 해외시장 개척이 큰 성공을 거두어서 1914년 400만달러의 매출은 1920년 1400만달러로 네배나 껑충 뛰었고 흑자로 반전했다. 그는 세계공황으로 경제가 나락에 빠질때도 직원을 한명도 해고하지 않으며 직원간의 단결을 도모하였고 이는 IBM의 평생고용신화로 이어졌다.   왓슨은 직원들에게 짙은 양복에 하얀셔츠 그리고 넥타이를 꼭 메도록 했는데 이는 고객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이는 고객만족 경영으로 이루어져서 CTR의 성공을 이루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회장에 취힘한 1924년에 그는 해외시장에서의 인지도 상승을 위해서 사명을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으로 바꾸며 회사의 성장을 견인한다. IBM이 컴퓨터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건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에이켄이 마크1이라는 컴퓨터를 개발할 때 제작비용과 장비를 제공하면서부터다.  하지만 마크 1의 발표회장에서 당시 왓슨사장은 자신의 좌석이 뒷자리에 있는 것에 격분한다. 당시 언론에서도 IBM의 역할은 별로 언급이 없고 오직 하버드 대학교의 에이켄 교수만을 칭송할 뿐이었다. 자신의 푸대접을 견딜수 없었던 그는 마크 1보다 훨씬 뛰어난 컴퓨터를 자체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이를 위해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왓슨 연구소를 1945년에 세운다. 그리고 드디어 IBM의 첫번째 컴퓨터 SSEC( Selective Sequence Electronic Calculator)를 개발한다.  하지만 SSEC는 상업적인 시도라기 보다는 만들었다는 것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왓슨 조차도 SSEC의 거대한 크기에 짜증을 부릴정도였다. 마침내 1952년 드디어 IBM은 대량생산이 가능한 IBM 701을 개발하고 판매에 돌입해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된다.


토마스 왓슨은 컴퓨터의 시대를 맞이하여서 이제는 회사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1955년부터는 토마스 왓슨의 아들인 톰 왓슨 주니어가 사장이되어서 경영을 승계한다. 토마스 왓슨은 회사의 미래가 타자기나 천공카드 시스템 같은 사무기기에 있다고 봤다. 하지만 그의 아들 톰 왓슨은 회사의 미래는 컴퓨터에 달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둘은 부자관계이지만 자주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아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을 하게 된 순간 경영을 넘겨주었다. 톰 왓슨은 컴퓨터 관련 사업에 과감하게 투자했다.   연 수입의 3분의 1을 컴퓨터 개발과 연구에 쏟아 부을 정도였다. 드디어 그는 원자폭탄 개발비용보다 두배가 넘는 50억불을 들여서 최초의 메인 프레임 컴퓨터로 일컬어지는 SYSTEM/360의 개발을 1964년에 완료한다. 


50억불짜리 도박은 완벽하게 성공해서 SYSTEM/360은 정부, 연구소, 기업등 컴퓨터가 필요한 모든 곳에서 사용되어 IBM이 컴퓨터 시장을 독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SYSTEM/360의 개발이후 IBM은 매년 30% 이상의 성장을 거듭하면서 1972년는 시가총액469억달러로 미국에서 가장 비싼 회사가 된다. IBM은 1985년 500억달러의 매출에66 억달러의 이익을 내며 세계 기업중에서 최고의 수익을 거두는 회사로 등극한다.  또한 IBM은 1983년부터 1986년 까지 경제전문지 포춘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으로 선정되면서 역사상 최고의 기업으로 인정받는다.  1987년에는 주식의 가치가 최고가인 176달러까지 상승하여 시가총액 787억달러를 기록하면서  역시 세계 1위의 기업으로 올라서는 전성기를 누린다. IBM이 삐걱거리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컴퓨터가 너무 잘 팔려서 이다. 컴퓨터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자 미국정부에서는 IBM에 반독점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은 1969년부터 1982년까지 이어졌으며 친기업성향의 레이건 정부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무죄로 결론난다.  하지만 장시간 이어진 반독점 소송으로 IBM에는  관료주의와 보신주의가 회사내에 뿌리박힌다.  경쟁업체를 조사하거나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어떠한 전략도 반독점 소송에서 불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회사를 험담하는 메모하나라도 반독점 소송에 영향을 줄수 있는 관계로 IBM 내부에서는 경쟁회사에 대한 어떠한 코멘트도 금지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와 소송중인 상황에서 경쟁업체에 대한 분석도 하지않고 그렇다고 고객에게 특별히 잘해주는 것도 아닌데 IBM의 제품은 끊임없이 날개 돋힌듯 팔렸다. IBM은 불황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상최고의 이익금을 경신했다. 


이렇게 되자 어느덧 IBM내부의 작원들 사이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한다는 자만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세상의 법보다 IBM WAY 가 더 강력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IBM 직원들의 자신감은 오만으로 가득차게 된다.  사실 IBM의 추락은 1990년에 들어서며 갑작스럽게 극적으로 일어났지만 회사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90년 690억 매출에 60억달러의 이익을 얻었던 IBM은 91년에는 640억달러의 매출에 28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또한 92년에는 645억달러의 매출에 50억 6천만달러의 적자로 미국 기업 역사상 최고 적자금액을 경신하면서 IBM에 대한 위기론이 급부상한다.  92년 연말이 되면서 세계의 언론은 IBM의 몰락을 주목하였다. 


연일 IBM을 화제로 해서 각종 이야기꺼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IBM의 화려했던 과거성적을 생각해보면 2년간의 연속적자는 회사로써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슬럼프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IBM의 적자가 구조적인 문제에서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IBM은 컴퓨터에 대한 모든 것을 만들고 사실상 독점을 했던 회사였다. IBM 컴퓨터를 대체할 컴퓨터가 세상에 존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IBM으로부터 컴퓨터를 구입한사람들은 제품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을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IBM이 그냥 철수해버리겠다고 말하면 회사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어야 했다. 손님은 왕이고 항상 고객이란 대접 받기 마련인데 IBM에게는 그럴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쓰는 대형 컴퓨터 즉 메인 프레임 시장에서 IBM은 유일한 공급자이자 절대자였고 고객은 IBM 컴퓨터를 하루라도 빨리 회사에 설치하기 위해서 IBM 직원을 상대로 로비를 펼쳐야 할정도였다. 





하지만 어느덧 히타치와 같은 일본전자 업체들을 선두로해서 IBM이 장악한 메인 프레임 시장에 도전장을 던졌다. 더 이상 IBM은 유일한 메인 프레임급의 컴퓨터를 공급할 수 있는 사업자가 아니었다. 일본업체의 약진은 IBM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또 한편으로는 데스크탑 컴퓨터의 약진도 눈에 띄었다. IBM은 소형컴퓨터를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데스크탑 컴퓨터의 성능이 좋아지면서 IBM이 장악했던 중대형컴퓨터 시장을 대체하여 갔다. 이는 뉴욕을 기반으로 한 IBM이라는 골리앗과 캘리포니아지역의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들이 연합을 한 다윗간의 거대한 주도권싸움이었다. IBM은 거대했지만 공룡처럼 굼떴고 판단이 느렸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들은 IBM보다 영리했고 민첩했다. IBM이라는 거대조직에서는 의사 결정이 체질적으로 실리콘 밸리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는 실리콘 밸리의 벤처기업은 어느덧 IBM의 각종 사업부를 따라잡고 있었다. 이미 말했듯이 IBM은 컴퓨터 하드웨어와 부품들 그리고 운영체체에서부터 각종 응용소프트웨어 모두를 개발했고 그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 원래 IBM은 독자적인 운영체제를 독점적으로 사용했는데 유닉스와 같은 개방형 소프트웨어가 등극하면서 그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중대형컴퓨터에서 유닉스를 탑재한 썬마이크로 시스템즈와 휴렛패커드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또한 썬마이크로 시스템즈와 휴렛팩커드는 워크 스테이션의 성능을 향상시켜서 IBM의 독무대였던 메인 프로임 시장에도 진출하면서 점유율을 향상시켰다. 컴퓨터의 저장장치 역시 IBM이 최초로 개발하였고 시장의 왕자였다. 하지만 대형 저장장치 시장에서는 EMC가 소형장치에서는 시게이트가 IBM을 따라잡았다. 네트워크의 개념 역시 미국 국방성의 지원을 받은 IBM이 만들어 놓았고 이에 대해서는 확실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소프트웨어적인 표준 규격에서 TCP/IP에 뒤쳐졌고 하드웨어 장치에서는 시스코에게 주도권을 넘겼다. 대형컴퓨터를 위한 데이터 베이스 프로그램도 오라클에게 밀렸고 소형 컴퓨터를 위한 데이터 베이스도 로터스에게 시장을 내주었다.  PC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소형컴퓨터 시장에 진출했던 IBM-PC사업부 마저도  델과 컴팩의 협공에 위태롭기 그지없었으며 적자행진을 거듭했다.


IBM은 컴퓨터와 관련된 모든 제품을 최상급으로 개발해내는 업계의 유일무이한 존재였다.이런 절대적인 위상을 바탕으로 수익을 창출했던 IBM이 모든 컴퓨터 관련 제품의 품질이 2류로 전락하면서 적자 행진이 시작됐기에 IBM의 추락은 막을 수 없을 듯이 보였다.  모든 언론과 유명인사들은 IBM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봤다.  애플의 컴퓨터 광고를 담당했던 스티브 헤이든(Steve Hayden)은 IBM이 총체적인 부실상태라고 진단했으며 오라클의 창업자 래리 앨리슨은 IBM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말하였다. 특히 컴퓨터 저널리스트로 유명한 찰스 퍼거슨(Charles H. Ferguson) 과 찰스 모리스( Charles R. Morris)가 쓴 컴퓨터 전쟁(Computer Wars)에서 IBM의 몰락은 한때 세계를 풍미했던 소련의 붕괴와 비슷하다고 하여서 많은 사람들의 반향을 일으켰다. 

IBM에게 있어서 더 문제였던 것은 외부에서 회사의 몰락을 점치고 이렇게 떠들어 대고 있었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보다 못한 IBM 이사회의 짐 버크(Jim Burke)가 회장겸 CEO인 존 에이커스를 사임시키기로 마음 먹는다. 짐버크는 미국의 대표적인 의약품회사인 존슨앤 존슨의 (Johnson & Johnson)의 CEO로 ibm의 사외이사로 활동중이었다. 1982년 정신병을 앓던 사람이 진통제인 타이래놀에 독극물을 넣어서 여덟명의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존슨앤 존슨은 큰 위기를 겪게 된다. 이때 짐버크는 미국에 있는 모든 타이래놀 제품을 회수하고 새로운 포장용기를 개발할때까지 시장에 제품을 팔지 않았다. 기존의 캡슐형태는 누군가 뜯어본 흔적이 남지 않지만 알약형태로 포장을 바꿈으로 누군가 포장을 열어보면 흔적이 바로 나타나게 하였다.  


타이래놀은 1억달러의 손해를 봤지만 사람들은 짐버크회장의 용기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내었다.  타이래놀 사건으로 인해서 침몰직전 까지 갔던 존슨앤 존슨은 짐버크 회장의 뛰어난 윤리경역덕분에 예전보다 사람들의 더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비록 짐버크는 외부에서 초빙된 이사회멤버였지만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경영자였던 만큼 그의 명성과 영향력이라면 존 에이커스를 사임시킬 수 있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1992년 12월 짐버크는 그의 명성을 발휘하여 몇몇 이사회 멤버들을 규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3년 1월 마침내 존 에이커스를 탄핵시키고 새로운 CEO를 임명하기 위한 인사위원회를 구성한다.




IBM의 차기 CEO로 가장 먼저 언급된 사람은 적자 투성이의 GE를 살려낸 경영의 천재 잭웰치였다. 잭웰치는 부임하자 GE의 CEO로 임명되자 마자 강력한 구조조정을 시행하였다. 그는 10만명이 넘는 인력을 정리해고 하였는데 자고 일어나면 회사의 건물은 그대로 인데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고 해서 중성자탄 잭이라는 별명까지 생길정도였다. 당시 인사위원회 사람들은 잭웰치가 시행했던 강력한 구조조정이 IBM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를 어떻해서든지 스카우트 하려고 했다.  하지만 잭웰치가 자신의 왕국인 GE를 떠날마음이 있을리가 없었다. IBM은 그래도 여전히 최고의 CEO를 영입하기 위해서 매우 이례적으로 미국의 양대 헤드헌팅 업체인 하이드릭 앤 스터러글(Heidrick and Struggle) 스페선 스튜어트(spencer struart)모두에 일을 주기까지 하였다.


IBM은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경쟁상대중의 하나였던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게이츠에게도 CEO를 제의했지만 퇴짜를 맞았고 개인용 컴퓨터 시장의 맞수였던 애플의 존스컬리(John sculley)에게도 역시 거절당했다. 그 밖에 얼라이드 시그널의 CEO 래리보시디(Larry Bossydy) 모토로롤라(Mortorola) CEO 조지피셔 역시 IBM의 제안을 받았지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IBM으로부터 CEO를 제안 받지 못한 미국의 경영자는 없을 것이라는 농담까지 하였다. 하지만 IBM의 암담한 미래 때문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루거스너가 IBM에 전격적으로 회장겸 CEO로 지명되면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IBM을 부활시킨 루거스너 이야기는 다음에도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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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
애플 이야기2010.11.10 08:05

지금 세상은 애플, 구글, MS의 치열한 삼국지가 펼쳐지고 있지만 과거에는 애플, IBM, MS의 IT 삼국지가 펼쳤졌죠. 그때를 생각하며 1차 IT 삼국지시대의 이야기들을 작성하여봤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


최근 애플 부사장이었던 페이지 마스터가 전격적으로 사임하자 여러 추측들이 쏟아졌다. 아이팟을 개발한 토니 퍼델 후임으로 2년전 IBM과 소송까지 불사하면서 데려온 페이지 마스터는 애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IBM의 분쟁 때문에 정식 업무를 시작한지 1년 4개월만에 페이지 마스터가 전격적으로 회사를 그만두자 이를 두고 아이폰 4의 안테나 게이트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월스트리트 저널에 의하면 페이지 마스터가 애플의 기업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스티브 잡스의 신임을 잃은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애플은 원래부터 기존의 권위주의를 싫어하는 서부 지역 특유의 히피문화를 물려받았기 외부 인사들이 잘 적응하지 못하는 회사로 알려졌다.  특히 서부 지역과는 반대되는 기업 문화를 가진 동부 지역의 기업 그것도 IBM을 다닌 페이지 마스터는 더더욱 적응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1980년 애플과 IBM 사이에서 치열하게 벌어진 PC 전쟁은 단순히 라이벌 회사간의 경쟁이 아니었다. 애플과 IBM은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의 자존심 싸움과도 같았다. 유럽과 교류하기가 쉬웠던 동부지역은 모든 경제 환경이 서부지역보다 월등히 좋았다.

 그래서 서부지역에서 태어나서 대학까지 다닌 사람도 취직을 위해서 뉴욕 같은 동부지역으로 떠나야 했다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명문사학인 스탠포드 대학교의 프레드릭 터먼교수는 제자들이 대학을 졸업하자 마다 동부지역으로 떠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마침 그가 아꼈던 제자인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있었는데 대학을 졸업 후 각각 취직과 진학을 위해 동부지역으로 떠났다가 다시 서부로 돌아오자 그들에게 창업을 권유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다. 회사이름은 동전 던지기를 통해서 결정했다. 동전 던기지는 휴렛의 승리가 되었고 회사이름은 휴렛 & 팩커드 즉 HP가 되었다. 차고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538달러의 자본으로 시작된 이 회사는 현재 개인용 컴퓨터 세계 1위의 오른 HP이다.

 HP는 오늘날 실리콘 밸리의 시작으로 칭송받고 있다. HP 성공 이후 과수원밭이었던 실리콘밸리 지역은 첨단 벤처 산업의 요람이 되었다.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는 HP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애플의 청사진을 마련했고 스티브 워즈니악은 정식직원으로 근무했을 정도로 HP와 애플은 여러가지로 인연이 깊다. HP이후 인텔 같은 여러벤처 기업들이 성공했지만 여전히 동부지역의 회사들에 비하면 꼬맹이에 불과했다. 바로 이때 애플이 등장해서 동부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인 IBM에 도전장을 던진다. IBM은 메인프레임 같은 대형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고 컴퓨터 산업의 지배자였다. 70냔대 중반만 해도 컴퓨터는 곧 IBM으로 통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두명의 젊은이가 차고에서 시작된 애플은 창업한지 단 4년만에 주식시장에 상장되었고 포드 자동차 이후 가장 성공한 기업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은 단숨에 억만장자에 등극하면서 미국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애플의 갑작스런 성공에 자극 받은 IBM은 곧 PC를 통해서 반격을 한다.  IBM-PC가 발매되자 이를 구입해서 분해를 해본 스티브 잡스는 성능과 기능면에서 엉망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IBM이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뛰어든 것을 환영하는 광고까지 내보낼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처음에는 애플과 IBM이 그야말로 치열하게 싸웠고 언론도 이를 흥미롭게 지켜봤다. IBM과 당당히 경쟁하는 애플의 모습은 그 동안 뒤쳐졌던 서부의 반격과도 같은 것이었다.  두회사의 문화를 보면 서부와 동부의 지역차이를 알 수 있다. 유럽과 교류를 하면서 발전한 동부지역은 오랜 역사를 가진 회사가 많은 만큼 전통을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경향이 많았다.

 이에 비해서 서부지역은 기존의 보수적인 문화에 반기를 든 히피 문화의 탄생지 답게 진보적이었다. 이런 차이는 그들의 복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애플은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의 회사였다면 IBM은 양복을 입은 신사들의 회사였다. 애플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심지어 양복도 없다. 동부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는 통신회사인 AT&T의 직원들이 애플직원에게 회사의 이사를 만날 때는 예의차원에서 양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자 애플은 양복을 입지 않는다면서 애플 직원들은 양복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고 반박할 정도로 양복과는 거리가 멀다. 이에 비해서 IBM은 복장이 엄격해서 무조건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입어야만 한다. 이러한 복장 차이가 기업 문화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IBM은 예의바르고 항상 격식을 차리는 어른의 회사지만 반면에 권위주의적이며 관료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에 비해서 애플은 대학생처럼 활기차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대학생들의 회다. 하지만 사려깊지 못하고 즉흥적이며 팀보다는 개인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애플 일본의 지사장이었던 하라다 에이코씨에 의하면 애플직원이 자신의 개성을 중요시 여기는 락앤롤의 밴드멤버라면 IBM은 하모니를 중요하게 여기는 교향곡 연주가와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에이코에 의하면 팀 플레이를 통해서는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신 락앤롤 연주자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기 쉬운 위험함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애플과 IBM의 문화적 차이가 큰 만큼 IBM에서 일했던 페이지 마스터가 애플에 얼마나 적응하기가 힘들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간다.

애플과 IBM의 차이는 스티브 잡스가 주창한 해적정신에 집대성되어 있다. 스티브 잡스는 생각지도 못한 IBM-PC의 돌풍으로 회사가 위기에 빠지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매킨토시를 개발한다. 매킨토시 개발자들에게 스티브 잡스는 해군이 되지 말고 해적이 되라고 강조했다. 해군은 기존의 사물과 관습을 지키기에 급급하지만 해적은 이를 과감하게 파괴한다. 해군이 IBM이었다면 해적은 애플이었다. 애플은 창조적 파괴를 통해서 IBM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자 하였다. 사실 1980년만 해도 IBM의 매출은 애플의 200배에 이르고 연구금액은 100배가 차이나는 거대 기업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큰 회사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성공 방식대로 싸워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기존의 성공 방식은 결국 돈이 많은 회사가 승리하기 마련이다. 그런 회사와 싸워서 이길 려면 결국 더욱 새롭고 창조적인 제품을 내놓야만 한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매킨토시는  텍스트기반의 개인용 컴퓨터와는 완전히 다른 그래픽 기반의 컴퓨터였다.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를 내놓으면서 IBM과의 경쟁을 더욱 극적이면서도 애플을 구원자로 만들고 싶었다. 이때 제작된 광고가 그 유명한 1984이다. 소설 1984는 절대권력을 가진 빅브라더스가 개인의 사생활을 완전통제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매킨토시 광고는 소설속 내용을 그대로 담아내었다. 대형 스크린에서 빅브라더가 끊임없이 윽박지르면 넋이 나간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과 의지도 없이 빅브라더에 복종하는 이미지가 그대로 전해진다. 이때 망치를 든 여인이 총으로 무장한 경비병들을 따돌리고 달려와서는 빅브라더의 모습이 있는 대형스크린에 망치를 던진다. 그리고 자막을 통해서 애플이 1984년 애플이 매킨토시를 소개한다면서 왜 소설의 1984와 현실의 1984가 다른지를 곧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광고는 단 한번 방영했지만 미국에 센세이셔널한 충격파를 선사한다. 1984광고는 엄청난 호평을 들으며 각종 광고상을 휩쓸었고 26년이 지난 지금도 화제가 될정도로 광고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이 광고에서 전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광고속 빅브라더스가 IBM이고 도끼를 든 여인이 애플이었다. IBM이 지배하는 컴퓨터 세상을 애플이 파괴하겠다는 의도가 이광고에 담겨져 있었다. IBM을 악당으로 만들고 악당과 맞서 싸우는 영웅 애플의 모습은 오늘날 애플에 열광적인 마니아들을 탄생시켰다. 광고 덕분에 매킨토시는 출시되자 마자 5만대 이상이 판매되면서 매진행렬을 이어간다.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를 탑재한 매킨토시는 기존의 컴퓨터와는 완전히 달랐고 개인용 컴퓨터를 재발명했다는 극찬을 들었다. 하지만 매킨토시에는 응용 프로그램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판매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실적 부진으로 스티브 잡스와 이사회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고 결국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나고야 만다.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가 사무실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고품질의 인쇄를 가능하게 하는 프린터와 소프트웨어를 개발중이었는데 그의 이런 노력이 1985년 엘더스사에서 등장한 페이지 메이커이다. 페이지 메이커는 전자출판 혁명을 불러 일으키며 실적악화로 어려움에 빠져있던 매킨토시의 구원자가 된다. 페이지 메이커 덕분에 매킨토시의 판매량도 덩달아 급상승하며 애플은 화려하게 부활한다. IBM-PC는 일반 사람들을 위한 컴퓨터였다면 애플의 매킨토시는 그래픽전문가들을 위한 컴퓨터가 되면서 시장을 양분하게 된다.

정작 애플과 IBM의 치열했던 PC 전쟁의 최후 승리자는 마이크로소프트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IBM-PC에 DOS를 납품하면서 극성장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DOS를 개발하는 한편으로 애플의 매킨토시 운영체제를 베낀 윈도우를 만든다. 윈도우를 보고 분노한 애플의 CEO 존 스컬리는 빌게이츠를 직접 만나서 항의를 하였다. 이에 빌게이츠는 매킨토시 독점으로 응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주는 조건으로 매킨토시 운영체제에 사용된 인터페이스를 라이선스 해줄 것을 요구한다. 터무니 없는 요구였지만 기술에 문외한이었던 존 스컬리는 덜컥 빌게이츠가 원하는데로 계약을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스티브 잡스가 몇 년간 고생하면서 만든 맥 오에스를 빌 게이츠는 얼마든지 마음껏 쓸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한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마침 IBM에서도 매킨토시 처럼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를 만들려고 했다. 당시만 해도 IBM이 컴퓨터 업계를 지배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빌게이츠는 무슨일이 있어도 IBM과 끝까지 같이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IBM쪽 사람들을 설득해서 IBM이 준비하는 그래픽 기반의 운영체제인 OS/2를 마이크로소프트가 직접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에 IBM은 아무런 의심없이 제휴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OS/2의 개발속도가 너무나 느렸다. 마침 IBM 관계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OS/2를 만드는 척하면서 윈도우에 전력을 쏟는다는 것을 눈치챈다. IBM은 이에 분노하고 마이크로소프트와 관계를 정리하려 한다. 이때 빌 게이츠는 OS/2는 고급 컴퓨터들을 위한 운영체제고 윈도우는 상대적으로 속도가 낮은 저가형 컴퓨터를 위한 운영체제라면서 IBM을 설득한다.

  IBM은 기술에 문외한이었던 존 에이커스였는데 신기하게도 존 스컬리처럼 빌 게이츠의 감언이설에 넘아가고 만다. IBM은 마이크로소프트가 OS/2를 잘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였지만 그 기대는 얼마 후 산산히 깨져버렸다. 1990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야심작인 윈도우 3.0이 시장에 등장하자 돌풍을 일으킨다.  1년동안 무려 4백만개가 판매되었는데 이는 매킨토시가 6년 동안 팔았던 전체 총 누적수보다 많은 숫자였다.  윈도우 3.0이 대성공을 거두자 마이크로소프트가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당장 IBM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바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IBM은 이에 분노하지만 마이크로소프트는 너무나 커버렸다. 윈도우 95가 발매될때는 IBM 역시 눈치를 봐야할정도였다. 윈도우 95의 성공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위세는 더욱 커졌고  IBM은 아예 PC 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했다. 애플 역시 윈도우 95 광풍에 치명타를 입고 추락하기 시작한다. 1997년 애플에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1억 5천만달러 투자를 받게 되는데 이는 사실상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항복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IBM과 애플의 1차 PC 전쟁은 결국 두 회사의 관계를 적절히 이용한 마이크로소프트를 IT 황제로 등극시키며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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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멀티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