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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휴렛과 스티브 잡스의 특별한 인연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축복이 그의 양 부모였다면 두 번째 축복은 그가 살던 동네이다. 스티브 잡스가 살던 곳은 과수원이었던 지역이 실리콘밸리로 탈바꿈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는 자연스럽게 미래기술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다. 스티브 잡스는 1995년 스미소니언 박물관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리콘 밸리에서 자란 것이 정말이지 행운이었습니다. 제가 열 살이나 열한 살쯤 되었을 때 저는 첫 컴퓨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사(NASA)의 에임스 연구 센터였습니다. 지금 같은 컴퓨터는 아니었고 어떤 전기 단자였는데 이론적으로는 전선들이 다른 쪽으로 연결되어있는 컴퓨터였습니다. 저는 이 컴퓨터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데스크톱 컴퓨터를 본 것은 휴렛 팩커드였습니다. 9100A라고 불리는 세계최초의 데스크톱 컴퓨터였습니다. BASIC과 ALP로 운영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컴퓨터가 정말이지 좋았습니다. “




그런데 실리콘 밸리에 있는 그 수많은 회사 중에서 유독 스티브 잡스와 인연이 깊은 회사가 있다. 바로 HP이다. 어린 시절 스티브 잡스의 이웃 중에 래리 랭이라는 엔지니어가 있었다.  래리 랭은 HP 탐구자 클럽을 만들어서 잡스에게 전자공학과 관련된 지식을 가르쳐주었고 직접 전자기기로 실습을 하기도 하였다.  한번은 HP의 연구실을 방문해서 각종 첨단장치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 보자 마자 사랑에 빠졌다는 컴퓨터 역시 HP의 데스크탑 컴퓨터 9100A였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전자계산기로 할 수 있는 9100A는 20KG 는 넘는 육중한 크기를 자랑하였지만 당시 잡스에게는 실로 경이로운 제품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첫 번째 직장도 HP였다. 잡스는 래리 랭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전자기기를 직접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부품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짱 하나는 타고난 잡스는 전화번호부에서 HP의 창업자이자 CEO인 빌 휴렛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고등학교 1학년생의 전화라면 무시할 만도 한데 어찌된 일인지 빌 휴렛은 20분정도 통화를 하였고 원하는 대로 부품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잡스에게 방학 동안 일자리까지 주선해주었다.  기껏해야 나사를 조이고 푸는 일이었지만 잡스는 그 일이 너무 좋았다고 한다. (회사까지 그를 데려다 주고 집에 데려온 것은 그의 아버지 몫이었다.

그런데 겁 없이 회사 CEO에게 전화를 건 잡스도 잡스지만 또 생면부지의 어린 학생의 전화를 받아서 20분간이나 통화를 하고 회사에 불러서 공짜부품에 일자리를 주는 빌 휴렛을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실제로 빌 휴렛은 잡스의 전화를 받을 때부터 이미 역사의 위인으로 뽑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난 업적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실리콘 밸리의 젖줄 스탠포드 대학교와 휴렛 팩커드


세계의 IT 를 이끄는 IT의 수도 실리콘 밸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스탠포드 대학교의 역할을 이해해야만 한다.  스탠포드 대학교라는 강줄기가 있기에 실리콘 밸리라는 거대한 바다를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바로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구글을 창업하였다. 이밖에 선마이크로시스템즈, 야후, 시스코, 넷스케이프, 인스타그램의 창업자들이 바로 스탠포드 대학교 출신이다. 스티브 잡스 역시 스탠포드 대학교 내에 넥스트를 창업했었고 스탠포드와 각별한 관계 때문에 대학에서 요청을 하면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의 부인 로렌 파월 역시 스탠포드 대학교 출신이다. 처음 만남 역시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강연을 할 때였다.  물론 여러분들은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대학교의 졸업 연설을 했던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스탠포드 대학교는 단순히 훌륭한 인재를 배출한 것만이 아니라 실리콘 밸리의 탄생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회사이다. 스탠포드 대학교는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하고 철도 사업으로 큰 돈을 번 릴랜드 스탠포드가 창업하였다. 그가 학교를 설립한 데는 슬픈 사연이 있다. 1884년 그는 가족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였다. 이탈리아 여행을 하던 중 갑자기 외동아들인 릴랜드 주니어 스탠포드가 장티푸스에 걸려 그만 어린 나이에 죽고 만다.

크나큰 비통함과 슬픔에 빠진 스탠포드는 아들의 영혼을 달래고 후세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 아들의 이름을 따서 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스탠포드 대학교의 정식 명칭은 릴랜드 스탠포드 주니어 유니버서티(Leland Stanford Junior University)이다. 

초창기 스탠포드 대학교의 모습은 건물 몇 개에 불과한 매우 초라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자금을 후원해주는 릴랜드 스탠포드가 학교를 설립한지 불과 2년만에 사망하고 만다. 그를 대신해서 부인인 제인이 학교를 맡게 된다. 하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의 경제 위기로 철도회사가 부도를 맞이하면서 학교는 재정적으로 위기에 몰린다. 그러자 제인은 생활비를 최대한 아끼고 보석과 살림을 처분해서 학교 자금에 쓰도록 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5년을 버티며 겨우 학교를 운영하던 그때에 압류되었던 부동산을 되돌려 받는 판결을 받게 되자 학교도 재정적으로 여유를 찾게 된다.

오늘날 스탠포드 대학교가 실리콘 밸리의 젖줄 역할을 하는 것은 프레드릭 터먼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는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실리콘 밸리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듣고 있다. 프레드릭 터먼은 스탠포드 대학교 교수이자 현대적인 지능 측정 테스트를 만들어서 유명한 세계적인 심리학자 루이스 터먼의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학업성적이 뛰어났던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한다.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동부에 있는 MIT에 진학하여 전기공학박사가 되었고 정식으로 교수에 취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집에 들렀다가 폐결핵에 걸리고 만다. 당시 의술로서는 불치병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는 매우 힘든 투병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겨우 다시 몸을 추스른 그는 스탠포드 대학교로부터 시간강사직을 제의 받고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프레드릭 터먼은 무선공학 연구실을 운영하면서 라디오 엔지어링(Radio Engineering)이라는 책을 써서 이 분야의 권위자로 인정받게 된다. 프레드릭 터먼의 강좌와 책에 감동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데이비드 팩커드였다. 데이비드 팩커드는 1912년 변호사인 아버지와 고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콜로라도 푸에블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과학과 수학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그는 백과사전을 읽으며 지식을 쌓았다.  과학에 대해 흥미가 있던 그는 기계나 전자 장비를 직접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특히 팩커드의 관심을 끄는 것은 폭발물이었다. 그는 여러 화학물질을 섞어서 화약을 만들고는 이를 폭발 시키면서 놀았다. 어떨 때는 공장에 있는 진짜 화약을 훔쳐서 폭발놀이를 하였는데 한번은 실수로 팩커드의 왼손에서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터진다. 바로 응급조치는 취하였지만 잘못된 치료로 팩커드는 평생 비정상적 엄지손가락을 안고 살아야 했다.

운동에도 만능이었던 그는 미식축구, 농구, 육상 선수로 활약하였다. 특히 육상선수로 높이뛰기, 넓이 뛰기 등 각종 종목에서 우승을 하는 등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 하면서 느낀 것은 팀워크가 중요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운동경험을 살려서 회사를 운영할 때 팀워크를 중요한 원칙으로 채택하였다.

아버지는 팩커드가 자신의 직업인 변호사가 되기를 원하며 법학과에 진화하기를 바랬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기계와 전기에 관심이 많았던 팩커드는 전기 공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한다. 스탠포드 대학에 진학한 그는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미식축구, 농구, 육상 선수로 활약하였고 방학 동안에는 학비를 벌기 위해 광산과 벽돌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대학교 4학년이 되자 프레드릭 터먼은 팩커드에게 자신이 가르치는 무선 엔지니어링 수업을 듣도록 추천하였다. 프레드릭 터먼은 관련 분야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은 뛰어난 학자이자 교수였기 때문에 팩커드는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수업을 듣게 된다. 이때 함께 수업을 듣게 된 친구 중에 하나가 있었으니 잡스의 전화를 받고 선뜻 부품을 보낸 준 빌 휴렛이었다.

빌 휴렛의 아버지는 존스 홉킨스 대학 출신의 의사로 스탠포드 의과 대학의 교수로 일하였다. 덕분에 빌 휴렛은 어린 시절부터 부유한 가족 환경 속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12살에 아버지가 뇌암으로 돌아가시고 만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함께 유럽으로 떠나서 그곳에서 지냈으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다니게 된다. 그는 원래 난독증이 있었으나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비법으로 이를 극복하여,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학교 친구 정도로 알고 지내던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친해지기 시작한 것은 프레드릭 터먼 교수의 강연을 같이 들으면서부터다. 그런데 둘은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스탠포드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팩커드 처럼 풋볼팀에서 활약하고 싶어했지만 실력미달로 방출되었다.  팩커드는 모든 것을 열심히 하는 모범생 그 자체였지만 빌 휴렛은 각종 사고를 일으키는 장난꾸러기였다. 그래도 둘이 최고의 절친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이었다. 빌과 팩커드는 함께 콜로라도주에 있는 산후안 산맥으로 배낭을 메고 여행을 떠났는데 인적이 드문 곳에서 2주간 캠핑을 하였다. 이 여행을 계기로 빌과 팩커드는 서로를 이해하고 깊은 신뢰관계를 맺으며 60년의 우정에 초석을 다지게 된다. 둘은 이후에도 평생 낚시와 사냥여행을 함께 하면서 우정을 쌓아 갔다고 한다.


실리콘 밸리의의 1호 벤처기업 휴렛 팩커드


졸업 후 스탠포드 대학교 출신들이 으레 그렇듯이 둘은 동부로 떠난다. 당시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고급 인력이 서부지역에서 일할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팩커드는 제너럴 일렉트릭에 취직해서 뉴욕주에 있는 스케넥터디(Schenectady )로 이사하게 된다. 그리고 빌 휴렛은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해서 역시 MIT가 있는 메사추세츠로 떠나게 된다. 둘은 각자의 일과 학업을 위해 헤어졌지만 여전히 자주 만나서 함께 여행을 떠났다.

프레드릭 터먼은 평소부터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이 서부인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졸업하면 동부로 떠나는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프레드릭 터먼은 제자들이 서부에 머무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터먼 교수는 그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데이비드 팩커드와 빌 휴렛에게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사업을 시작하도록 끊임없이 설득을 하였다. 결국 1936년 빌이 먼저 서부로 돌아와 의료장비를 만드는 사업에 뛰어든다. 그리고 다음해에 터먼교수가 주선한 장학금 덕분에 팩커드도 스탠포드 대학교에 돌아온다. 

둘은 함께 사업을 구상하였고 드디어 1939년 1월 1일 회사를 창업한다. 그런데 회사 이름을 결정하는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회사명에 누구 이름을 앞에 먼저 사용하느냐가 문제였다. 그래서 둘은 동전을 던져서 결정하기로 했다. 동전 던지기의 승자는 빌 휴렛이 되었고 회사이름은 휴렛 팩커드(Hewlett Packard)로 결정되었다.

회사를 창업한 곳은 독신이었던 빌이 살고 있는 집 차고였다. 많은 실리콘 밸리의 차고 신화 중 가장 첫 번째 스토리가 바로 휴렛 팩커드이다. 그래서 휴렛 팩커드가 시작되었던 빌의 차고는 ‘실리콘 밸리의 탄생지’(Birth- place of Silicon Valley)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가진 유적지로 인정받게 되었다.




창업자금은 538달러였다. 그 돈은 팩커드의 부인인 루실이 내놓은 돈이었다. 그들의 사업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주문 받아서 제작해준다는 것이었다. 볼링장을 위해 파울라인 신호기를 만들어주거나 천문대에 제어장치를 제작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발명가적인 기질이 강한 빌 휴렛은 오디오 발진기를 직접 만들었다.  이 기계는 월트 디즈니(Walt Disney)가 운영하는 에니메이션 스튜디오에 8대가 팔렸다. 제품을 구입해간 디즈니는 지금까지도 명작 에니메이션으로 평가 받는  “환타지아(Fantasia)”를 만드는데 오디오 발진기를 이용하였다.

둘의 역할은 분명하였다. 빌이 제품을 만들었고 팩커드는 이 물건을 팔았다. 빌은 제품 개발자였고 팩커드는 경영자였다. 빌이 직원들이 열의를 가지도록 격려하는 스타일이었다면 팩커드는 강력한 리더쉽으로 직원을 이끌었다. 그런데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빌은 통신장교로 군에 입대하게 된다. 다행히 팩커드는 회사에 남아서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은 휴렛 팩커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된다. 군대에 안테나 제어장치등 각종 군사장비를 대거 납품 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났을 무렵에는 판매수익이 100만 달러에 육박했고 무려 200명이 넘는 직원이 회사를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문제가 발생했다. 전쟁이 끝나자 정부로부터의 군사장비 주문이 급감하였다. 팩커드는 어쩔 수 없이 직원들을 해고 해야 했는데 그에게는 뼈를 깎는 고통처럼 가슴 아픈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이때 느낀 감정과 경험은 그가 나중에 해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빌 휴렛은 군대에서 쌓은 경험덕분에 훨씬 더 뛰어난 엔지니어가 되어서 돌아왔다. 또한 군대에서 많은 엔지니어들을 알게 되었는데 이들을 고용함으로써 회사의 기술을 높일 수 있었다. 회사는 어려움에 빠졌지만 기술자들은 대부분 회사에 남았고 극 초단파 장비를 집중 연구하였다. 그리고 극 초단파 사업덕분에 HP는 또 다시 거대한 성공을 재현하게 된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휴렛 팩커드는 50년대 초반 1년에 두 배씩 성장하는 회사가 되었다.


<다음회에 계속> 

IT 왕조실록은 전자책으로 출판되어 있습니다.

멀티라이터의 IT 왕조실록 2.0은 IT 왕조실록 5권과 그외 4권  총 9권의 책이 전자책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멀티라이터의 IT 왕조실록 2.0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IT 왕조실록 1권 : 스티브잡스와 빌게이츠의 PC 혁명
IT 왕조실록 2권 : 빌 게이츠의 소프트웨어 전쟁과 윈텔의 시대
IT 왕조실록 3권 : 인터넷의 시대 구글의 탄생과 IBM 의 부활
IT 왕조실록 4권 : 애플의 부활과 스마트폰 삼국지
IT 왕조실록 5권 : 페이스북 그리고 모두를 위한 소셜네트워크 시대

IT 왕조실록에 포함된 별책도서


6권IT 슈퍼리치의 탄생
7권 스티브잡스 명언집
8권 기획의 신 스티브 잡스
9권 애플 성공 신화의 비밀

IT 왕조실록의 구입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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