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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개인용 컴퓨터 빅뱅의 시대가 열리다


여기서 잠깐 애플 II 컴퓨터의 라이벌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래야만 당시 애플 II 컴퓨터가 활약했던 시장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77년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한 해이다.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창조한 애플II 컴퓨터를 비롯하여 탠디사의 TRS-80 그리고 코모도어 PET이 등장한 해이기 때문이다. 


탠디사는 원래 가죽을 판매하는 회사였고 자회사로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체인점인 라디오 셰크(Radio Shack)를 가지고 있었다. 라디오 셰크의 고객인 돈 프렌치는 (Don French) MITS의 알테어 컴퓨터를 구입한 후에 이에 영감을 얻어 독자적인 컴퓨터를 만든다. 이를 라디오 쉐크의 판매담당 부사장인 존 로치(John Roach)에게 보여준다.  돈 프렌치의 컴퓨터는 판매되지 않았지만 라디오 쉐크가 컴퓨터시장에 진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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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프렌치와 존 로치는 제대로 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데 네셔널 새미컨덕터(National Semiconductor)에 다니는 스티브 라이닝거(Steve Leininger)라는 젊은이를 알게 된다. 그는 애플 I 컴퓨터를 처음 판매했던 바이트숍에서 일한적이 있고 잡스와 워즈니악이 활약했던 홈브루 컴퓨터 클럽의 멤버이기도 했다. 


프렌치와 라이닝거가 함께 만든 개인용 컴퓨터는 TRS-80으로 알려지게 된다. TRS는 Tandy Radio Shack 의 약자이고 80은 그들이 사용한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Z-80칩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지자 탠디의 대표인 찰스 탠디에게 시연을 하였다. 하지만 망신스럽게도 컴퓨터가 멈추고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언론에 라디오 셰크가 컴퓨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유출되었기 때문에 이를 취소시킬 수는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TRS-80이 완성되어 발매가 되긴 한다. 사실 라디오 셰크는 대략 3천대 정도가 판매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 전역에 있는 라디오 셰크의 매장들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재고는 처리할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하지만 출시 한달 만에 만대가 판매되면서 그들의 예상은 기분 좋게 깨져 버린다.






코도모어 PET은 전자계산기를 판매하던 코모도어에서 판매한 제품이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가 가격전쟁을 펼치자 규모가 작았던 전자계산기 회사들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때 코모도어의 창업자 잭 트레미엘(Jack Tramiel)은 텍사스 인스 트루먼트의 경쟁력은 내부에서 직접 칩을 생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76년 척 페들((Chuck Peddle)이 창업한 MOS 테크놀로지사를 80만 달러에 인수한다.


 참고적으로 애플 컴퓨터에 들어간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바로  MOS 테크놀로지의 MOS 6502였다.  한때 코모도어는 애플을 인수하려고 하였다.  마침 척 페들은 스티브 잡스와도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다. 애플 I 컴퓨터에 MOS 6502칩을 채용한 잡스와 워즈니악이 척 페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MOS사의 창업자이자 MOS 6502칩의 메인 디자이너인 척 페들은 1937년생으로 잡스와는 19살이나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부탁을 받은 후 차고를 직접 방문해서 친절하게 도움을 준다. 그 후에도 교류는 계속 된다. 척 페들은 자신이 만든 소형컴퓨터인 KIM-1을 가지고 잡스와 워즈니악에게 시연을 해 보이기도 했다.


코모도어에 회사가 인수된 후 페들은 잡스의 차고를 방문하여서는 애플을 인수하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친다. 잡스는 애플 인수조건으로 10만 달러, 코모도어 주식 일부, 워즈와 자신에게 3만 6000달러의 연봉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계약은 물론 성사되지 못했다. 코모도어의 창업자인 잭 트레미엘과 협상을 하면서 그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쌓여갔기 때문이다. 잡스는 잭트레미엘과 거래한 회사 중에서 만족하는 곳을 한군데도 찾을 수 없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트레미엘에 회사를 넘기고 싶은 생각을 접게 된다.


물론 코모도어 역시 차고에서 일하는 두 친구를 그렇게 비싼 값에 영입할 생각이 없었다.  거래가 무산된 후 잭 트레미엘은 척 페들에게 1977년 6월에 열리는 전자제품 전시회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까지 컴퓨터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애초에 척 페들은 잭 트레미엘이 컴퓨터사업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애플 컴퓨터를 소개시켜준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원래 노렸던 목적은 이룰 수 있었다. 척 페들에게 남겨진 시간은 6 개월이 주어졌다. 물론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이미 컴퓨터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는 그는 코모도어 PET을 약속대로 만들어 냈다.  그가 만든 컴퓨터는 1977년 10월부터 판매에 돌입한다. 코모도어 PET  역시 밀려나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최초의 킬러앱 비지 캘크의 탄생과 개발비화

 

그러면 이번에는 애플과 탠디 그리고 코모도어가 삼파전을 이루면서 맹렬하게 경쟁하던 바로 그때 애플을 가정용 컴퓨터 시장의 주인공으로 만들게 해준 비지캘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비지캘크는 댄 브리클린이 하버드 대학교 비즈니스 스쿨의 MBA 과정을 공부하던 중에 떠오른 아이디어다. 그는 운행에 도움이 되는 각종 수치들을 멋지게 보여주는 전투기 계기판처럼 컴퓨터에서 각종 계산식들을 그렇게 멋지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마침 교수가 강의 중에 알려준 생산 계획표를 보면서 그의 생각을 더욱 구체화할 수 있었다.  생산계획표에는 생산을 위한 여러 단계가 있고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투입되는 인력, 비용, 원가, 시간 등이 행과 열로 표시되어있다.  보통 이러한 생산 계획표는 칠판에 적어 놓는데 어떤 것은 하나의 칠판도 부족해서 여러 개의 칠판을 연결해야 할 정도로 복잡하다. 문제는 중간에 관련 인건비나 원가 같은 수치 하나를 바꾸면 칠판 전체의 모든 항목을 수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숫자 하나 때문에 칠판에 적힌 모든 수치를 다 바꿔야 하는 바로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자동으로 계산을 처리해주는 마술 칠판이 있으면 어떨까? 라는 상상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바로 비지캘크이다. 사업을 하는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댄 브리클린은 MIT 대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밥 프랭크스톤과 함께 벤처기업을 세우고 싶어했었다. 실제로 둘은 각종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댄 브리클린이 밥 프랭크스와 함께 사업을 하자고 했을 때 이익금도 50:50으로 나누기로 쉽게 결정 할 수 있었다.


 서로가 해야 할 일도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댄 브리클린은 기획을 맡았고 밥 프랭크스톤은 개발을 책임졌다. 마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워즈니악의 관계와 비슷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댄 브리클린은 프로그래머로 일한 경력자라는 차이가 있었다. 


비지캘크가 애플 II 용으로 개발된 것은 우연이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필연이기도 했다. 브리클린은 퍼스널 소프트웨어의 댄 필스트라(Dan Fylstra)와 아는 사이였다.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댄에게서 컴퓨터를 빌렸는데 그게 마침 애플 II 컴퓨터였다. 그래서 이런 우연으로 비지캘크는 애플 II 컴퓨터용으로 개발되었다. 하지만 댄 필스트라가 애플 II 컴퓨터를 가지게 된 것은 스티브 잡스 덕분이었다.  마이크로 체스라는 게임을 애플 II 용으로 개발한다는 약속을 받고 스티브 잡스가 매우 적은 금액으로 애플 II 컴퓨터를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학생이었던 댄브리클린과 컨설턴트로 일했던 밥 프랭크스톤은 자금에 큰 여유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이 함께 작업을 시작한 곳은 밥 프랭크스톤의 다락방이었다. 프로그래밍을 개발할 때는 전화로 연결된 단말기를 이용하였는데 사용료가 낮보다 밤에 쌌기 때문에 이 둘은 낮에 잠을 자고 밤에 작업을 해야 했다. 나중에는 개발을 위한 컴퓨터를 따로 구입해야 했는데 이때는 자금이 부족해서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작업장소도 친구의 지하실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이 지하실이 문제였다. 지하철 선로 바로 밑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지하철이 지나갈 때 마다 작업장 전체가 다 흔들렸던 것이다.  비만 오면 하수구 물이 역류해서 둘은 작업장에서 떠나 있어야 했다. 어느 날은 컴퓨터가 있는 곳으로 물이 역류하는 바람에 컴퓨터가 망가질 뻔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역경의 순간을 이겨내고 1979년 10월 20일 드디어 장당 100달러에 비지캘크가 판매를 시작한다. 초기 판매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종류의 소프트웨어였기 때문이다. 댄 브리클린은 컴퓨터 상점에서 직접 시연을 하면서 판매에 열을 올렸다. 비지 캘크의 가치를 알아 본 사무직 직원들에 의해 입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회사로 달려가 비지캘크를 사달라고 졸랐다. 비지캘크의 판매량은 서서히 상승 곡선을 그려갔다. 그전까지 애플 II 는 사실상 게임기였다. 게임 이외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 비지 캘크가 컴퓨터 사용에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드디어 개인용 컴퓨터가 업무용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비지 캘크의 진가는 단순히 제품 그 자체에 있지 않다. 비지 캘크는 애플 II 컴퓨터의 판매량을 끌어 올리는데 일등 공신이 된다.


사실 비지캘크가 나오기 전만 해도 애플 II 컴퓨터는 코모도어 PET, 라디오 샤크의 TRS‐80과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그런데 비지캘크가 나온 이후 애플2 컴퓨터의 판매량이 수직 상승하면서 나머지 회사를 압도하게 된다. 실제 수치를 보면 1978년 애플II 컴퓨터의 판매량은 7,600대였지만, 비지캘크가 등장한 1979년에는 35,100대가 나갔고 1980년에는 78,000대나 판매된다. 이렇게 하드웨어 판매를 견인하는 소프트웨어를 우리는 킬러앱이라고 부르는데 이 말의 원조가 되는 것이 바로 비지 캘크이다.


비지캘크의 활약덕분에 애플의 매출은 매년 100%씩 성장했고, 창업한 지 단 4년 만에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1980년 12월 12일 애플의 주식이 공개되자 한 시간 만에 450만 주나 되는 모든 주식이 팔렸고, 그날 하루 동안 주식가격은 32%나 상승한다. 덕분에 스티브 잡스는 하루아침에 2억 1,750만 달러를 보유한 억만장자가 되었으며 스티브 워즈니악의 자산 역시 1억 1,600만 달러를 넘어섰다. 마이크 마쿨라의 주식 역시 2억 300만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았는데 이것은 그가 투자한 자금의 2,000%를 넘는 금액이었다. 포드 자동차 이후 가장 성공적인 애플의 주식공개는 미국 전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특히 25살에 불과했던 스티브 잡스는 미국에서 가장 젊은 부자로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개인용 컴퓨터라는 신세계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잘 생긴 스티브 잡스는 미국 젊은이들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애플이 너무나도 잘 나가던 바로 그 순간 IT 업계의 황제와도 다름없었던 IBM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1981년 IBM이 개인용 컴퓨터 시장 진출을 선언하면서 IT 업계는 또 다른 지각 변동이 시작된다.


<다음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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